우연에 우연의 결과
1990년,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겨울에 나는 태어났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가장 극심했던 해였다*. 그 해 남녀 영아 성비는 116.5대 100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1990년에는 여자아이가 100명 태어나면 남자아이는 116.5명 태어났다. 그 의미는 간단했다. 태어나지 못한 여자아이들이 많았다는 것. 병원에서 초음파로 성별을 알게 되면, 1990년 어떤 부모들은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누구를 살릴 것인지, 누구를 지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태어났다.
백말띠의 여자아이는 기가 세다고 했다. 말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 앞에서 어른들은 그런 말을 했다. "팔자가 드세다더라." "남자 잡아먹는 사주래." "결혼하면 시댁이 고생할 거야."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리고 알고 나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모르는 사람들의 거친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온 가족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으니까.
나는 양가의 첫 손주였다. 20여 년 만에 집안에 태어난 아기였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고모들까지 온 가족이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렇게 귀하게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내가 다섯 살이 되어서야 남동생이 태어났으니,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온 가족의 관심이 나에게만 집중되었다. 할머니들은 나를 품에 안고 키웠고, 오래전 사진 속 나는 항상 대여섯 명의 집안 어른들에 둘러싸여있었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마치 세상의 중심처럼 존재했다.
우리 할머니는 1936년생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을 거친 격동의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온 여성이었다. 1930년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한 시절을 지나고, 여성의 역할이 한정적이었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시대에 흔하지 않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걸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여자는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살아야 한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자주 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 말속에는 할머니의 인생이 녹아 있었다.
할머니가 어릴 때는 여자아이가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공부를 하고 싶어 했고, 집안에서도 특별히 공부를 허락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직장을 다니며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이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혼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고, 남편과 시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네가 평생 돈 벌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어디 가서 기 안 죽고 살지."
어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냥 할머니가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을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여자로 태어났어도 기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이 필수라는 것. 그런 응원 덕분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레슬링 선수가 되고 싶어 했던 다섯 살.
사실, 나는 꿈이 한 가지였던 적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미래의 직업이 바뀌었다. 유치원 때는 레슬링선수가 되고 싶었고, 간호사를 거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조금 크고 나서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변호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때마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을 적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뭐든 될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고, 새로운 꿈을 정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내 이름에는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부모님이 내 이름을 지을 때 바랐던 것은, 내가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는 것도 그 이름 덕분인지 모른다. 이름이 운명을 만든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가끔 궁금해진다.
만약 내가 1990년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1990년생이라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혹은 몇 년 전의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아니면 지금의 우리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꿈꿀 수 있었을까.
남아 선호 사상이 가장 강했던 해, 선택적 유산이 가장 많았던 해, 나는 태어났다.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던 그해에, 나는 운 좋게 태어났다. 그리고 좋은 가족을 만나, 차별 없이 기대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가끔은 태어나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한다. 문득, 내가 이룬 것들이 온전히 내 힘으로만 된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잘해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선택을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처럼. 오만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나의 삶이 사실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았기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끔 아득해진다.
* ¹ 한국경제, "1990년생 남녀 성비 불균형, 결혼·출산에 영향, " *한국경제*, 2022년 10월 11일,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10119265i.
** 한국에서 자연적인 출생 성비(남아 대 여아 비율)는 105~107:100 정도가 정상 범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선택적 출산과 성별 선호로 인해 그 비율이 크게 왜곡되었다.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가 훨씬 많이 태어났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