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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8년째 출근 중입니다.

국제기구 직원의 지속가능한 출근

by 야크



나는 국제기구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 보고서를 쓰고, 회의에 들어가고, 출장 가방을 싸고, 다시 풀고, 그리고 또 싸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이 일이 세상을 바꿀 줄 알았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 일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것도, 밤늦게까지 문서를 붙들고 있는 것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출근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나를 바꿔놓고 있다는 것을.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예전의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일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과 습관 사이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졌다. 나는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익숙해져서 계속하고 있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며 출근을 할 때는 일의 의미를 고민하다가도, 퇴근 후 소파에 누워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면 ‘뭐 어때, 좀 더 다녀볼까?’라는 결론이 난다.

나는 헬렌과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을 좋아한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흙을 밟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 하루하루 자급자족하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 그들의 삶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들에게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언젠가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땅을 일구고, 직접 만든 것을 먹고, 노동이 삶의 일부이지만 노동이 삶을 지배하지 않는 그런 삶.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하며, 최소한의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삶을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 나는 그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맞벌이 부부로서 나는 삶의 기본적인 부분조차 외주화 한 채 살고 있다. 청소도, 요리도, 심지어 건강 관리도 남의 손을 빌려와서 해결한다. 결혼한 지 1년도 안된 신혼부부지만 주중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고,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주말뿐이다. 일주일 내내 일에 치여 살다가 주말이 되면 겨우 한숨 돌리지만, 그마저도 출장을 다녀온 주에는 무용지물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서 내려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어색하게 “오랜만이야”라고 농담을 건넨다. 처음에는 ‘그래도 우리는 능력 있는 바쁜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점점 커져 갔다.

일의 의미를 고민하는 건 단순히 ‘이 일이 싫다’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날은 일이 싫지만, 어떤 날은 또 재미있고 보람도 있다. 문제는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왜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여전히 출근하는 걸까?

퇴사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는 사람들, 일을 좋아하는 건지, 그냥 익숙해서 계속하는 건지 헷갈리는 사람들. 나름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었고, 프로젝트도 성과를 내고, 때때로 보람도 느끼지만, 정작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느낌.

처음 국제개발을 꿈꾸며 이 일을 시작할 때는 고민의 방향이 달랐다. 그때의 질문은 ‘이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민은 ‘나는 이 일을 왜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나에게 가장 큰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이다.

국제개발의 세계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해서 항상 드라마틱한 순간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끝없는 보고서 작업, 일하며 보내는 수많은 낮과 밤들, 말 안 통하는 이해관계자들과의 줄다리기, 예상치 못한 변수들,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내가 하는 일이 진짜 세상에 좋은 일일까 라는 의구심. 처음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명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출장길에서 맞닥뜨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 아침 9시에 시작하기로 한 워크숍이 11시가 되도록 열리지 않을 때, 9시간 걸려 도착한 출장지에 제대로 일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보고서에 온갖 멋진 단어를 집어넣고도 정작 현장에서의 변화가 더디게만 보일 때, 마감 기한이 내일인데도 아직 자료를 받지 못했을 때, 일은 내가 다 해놓고 공은 어린 백인 남자아이가 가져갈 때,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점점 피로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만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이야기는 사실 특별하지 않은 출근과 퇴사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든 직장인의 이야기다.

퇴사를 고민하면서도 출근을 계속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일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익숙해서 계속하는 걸까? 좋아하는 일이 꼭 좋아하는 삶이 되는 걸까?
나는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결론이 퇴사가 된다고 해도,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단, 내일도 출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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