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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나의 작은 블랙독 이야기 (1)

by 야크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완벽한 하루였다.


하루 종일 컨디션도 좋았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샤워도 하고, 화장도 했다. 보통은 출근하기 바빠서 화장은커녕 선크림도 바르지 못하기 일쑤지만 오늘은 어쩐지 시간이 났다.


출근하는 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서 맛있는 커피도 테이크 아웃했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도 물 흐르듯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흘러갔다. 그 와중에 매번 까먹는 비타민과 유산균, 항우울제 약도 까먹지 않고 제때 복용을 했다.


퇴근하고는 집 앞에 있는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일본식 선술집에 가서 돈가스와 맥주 한 병을 시켜 먹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3시간 동안 논문을 썼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서, 한참을 핸드폰 게임을 했다.


보통 나는 8시면 잠이 든다. 힘들어서 그 이상 깨어 있을 수가 없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입에 밥을 쑤셔 넣으면 이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진다. 침대에 누워서 방 전등을 꺼놓은 채 10시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그제야 일어나 씻고 전등을 끄고 잠에 든다.


여기까지 읽고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회사는 9시까지 출근인데, 내 알람은 8시에 맞춰져 있다. 사실 내 알람은 6시부터 30분 간격으로 맞춰져 있지만, 매번 잠결에 알람을 끄고 일어나는 시간은 8시다. 그러니깐 씻고 화장할 시간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대충 옷 챙겨 입고 출근하기 바쁘지.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잠을 잔다. 주중에는 12시간, 그리고 주말에는... 저번 주말에는 토요일, 일요일 합쳐서 40시간을 잤다. 하루에 20시간이다.


우울하다고 하면 사람들은 '우울'이 '기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쉽게 말한다. '힘을 내, ' '긍정적으로 생각해'. 혹은 그러기 때문에 우울증이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모님에게 우울증임을 고백했을 때, 엄마 아빠는 나를 볼 때 물어봤다. '오늘 기분은 어떠니?'


안다, 다 나를 생각해서 물어보는 이야기라는 걸. 하지만 나의 우울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우울은 에너지의 문제였다. 아주 오래된 전자기기를 본 적이 있을까, 충전을 아무리 오래 해도 충전이 되지 않는다. 충전기에 꼽아놓은 순간은 어떻게든 쓸 수 있지만, 충전기 선을 분리한 순간부터 배터리가 훅훅-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주 오래된 전자기기. 그게 바로 나의 상태이다.


나의 우울은 기분의 문제이기보다 에너지의 문제이다. 그 어떤 것도 할 기운이 안나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니깐, 일은 꾸역꾸역 해내다 보니깐, 퇴근을 하고 오면 정말 손 하나 까닥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회사에서 돌아와서 침대로 직진하고, 그대로 일어나서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상태. 회사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은, 침대 바깥으로 나와서 화장실 가기도 힘든 상태. 그래서 참고 참고 참다가 겨우 화장실에 가는 그런 상태.


그런 상태가 몇 개월째 지속되고 있었다. 항우울제를 먹고 있지만, 그래도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간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그중에 마주한 완벽한 하루였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8시만 되면 넉다운되어서 침대에 쓰러지던 나인데, 새벽 3시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오늘, 완벽한 하루의 다음 날. 다시금 온몸이 납덩이같은 하루가 도래했다.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들어, 회사에 반차를 냈고 회사를 가서도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회사에서는 크나큰 문제가 터져서 그것을 수습하느라 지금 12시가 다 되도록 일하고 있고, 그냥 일하기는 너무 힘드니깐 딱 한잔만 마시겠다던 사온 위스키는 다섯 잔 째다. 일을 멈췄고, 지금 나는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쓴다.


어쩐지 운수가 디질라 게 좋더라니.


오늘의 일기: 우울증은 그네를 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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