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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래

세상의 끝이 있다면

by 야크

1999년 여름. 초등학교 교실 오른쪽 창문으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창문 틈으로 분필 가루가 희미하게 흩날렸고 (그렇다, 나는 칠판에 분필로 수업을 하던 세대였다), 칠판에는 선생님이 적어둔 수업 내용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덥고 나른한 오후였다. 그때였다.


짝꿍이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속삭였다.


"야, 야, 야!”


나는 고개를 돌려 짝꿍을 봤다.


“야, 우리 이제 망했대. 우리 다 죽는대!”


“그게 무슨 말이야?”


“7월에 지구가 멸망한대. 진짜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교실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1999년,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다."


그 문장은 낡고 오래된 책에서 기이한 주문처럼 퍼져나갔다. 프랑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16세기에 남긴 예언 속에서 1999년은 ‘종말의 해’로 해석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유성이 지구를 강타할 것이라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핵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믿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우주에서 온 미지의 존재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올 것이라 속삭였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졌고,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종말의 모습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누군가는 뉴스를 보고 왔다며, "야, 야! 미국에서도 이거 진짜라고 했대!"라고 외쳤다. 교실이 한순간에 어수선해졌다. ‘공포의 대왕’이라는 단어는 어린 나의 마음속에 서늘한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골목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늘이었다. 태양은 여전히 반짝였고, 가로수 잎사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을 푹 덮어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로 세상이 끝나버린다면? 아무도 남지 않는다면? 내가 사라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숨이 멎는 것? 그냥 사라지는 것? 아니, 죽음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일 것 같았다. 그 고민은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나라는 개인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내가 내 삶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내 삶은 지속되는 걸 거야."


내 존재는 사라질지 몰라도, 내가 누군가를 살린다면, 내가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돕는다면, 나는 그 사람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면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이타적인 나의 꿈은 사실 이기적인 10살 어린아이의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살 때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었다. 15살 때에는 검사가 되고 싶었다. 나쁜 사람을 잡고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도울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누군가 내게 꿈을 물으면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농담반 진담반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사회적’인 무언가였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내 관심은 언제나 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해외 봉사활동을 나가 6개월 동안 스리랑카 쓰나미 피해 지역에서 활동했다. 재해가 남긴 잔해 속에서 아동센터와 도서관을 운영하는 일을 도왔다. 국제앰네스티,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서 인턴과 계약직 직원으로 일했다. 대학교에서는 학회 활동을 하면서 굳이 통일학회를 골랐다. ‘민족과 함께’와 ‘사람사랑’이라는 그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대학 4학년이 되었다. 친구들은 공채를 넣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면접을 보러 다녔고, 하나둘씩 친구들의 취업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나는 어디에도 지원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아니, 안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교 내내 일반 기업과는 거리가 먼 활동만 했던 내가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고, 졸업을 한다고 일반 기업에 갑자기 관심이 생길 리도 없었다.


내가 해왔던 일들은 기업에서 요구하는 직무 역량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의 경험들은 기업이 원하는 ‘실무적 경험’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 내가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지원서를 넣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넣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입사 지원서에 적을 ‘정량적 성과’를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경험을 숫자로 환산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기업이 원하는 ‘적합한 인재’라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출 자신이 없었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물론 지금에야, 이것이 굉장히 편 합한 생각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반 기업의 일들도 사회 속에서 일어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원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아니, 안 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가 된 적이 없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나는 항상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었다. 매년 새로운 학년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반이 배정되었으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된다. 학생증이 사라지고, 시간표도 없고, 학년이 올라가는 자연스러운 흐름도 없다. 더 이상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늘 사회가 정해놓은 트랙을 따라 달려왔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정해진 코스에서 주어진 방향으로 뛰었고, 나는 그 트랙 위에서 비교적 잘 달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더 이상 선이 그려진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나는 처음으로 길이 없는 공간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 누구도 내게 ‘다음은 이것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내 삶의 길을 개척해야 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내 친구들은 공채 시험을 준비했고, 면접을 보러 다녔으며, 합격 소식을 주고받았다.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졸업 후 나의 선택지는 세 가지로 좁혀졌다. 첫 번째,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활동하는 것. 두 번째, 생활협동조합에서 먹거리 문제를 고민하는 것. 세 번째, 사회적 기업에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


문제는 뻔했다. 밥벌이.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다 월급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들조차도 결국 생계를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활동가들이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현실을 실감했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착한 소비를 통해 공동체를 살리자는 이념은 멋졌지만, 정작 생활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어 보였다. 사회적 기업은 조금 나아 보였지만, 그것 역시 ‘사회적 가치’와 ‘수익성’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돈이 많은 삶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주는 안정감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과외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접 돈을 벌어 생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내가 선택한 길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나의 가치와 현실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할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곧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끝에, 나는 사회적 기업을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공정여행을 하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여행을 기획하는 일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매력적인 일이었고, 동시에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밥벌이와 가치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속이 없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던 나는,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나의 소속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내 꿈을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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