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

2018.07.31 과외 일지

by 까칠한말티즈

여느 때처럼 과외를 하던 오후였다. 하루 두 탕을 뛰자니 꽤나 피로가 몰려왔다. 선생이란 놈이 피곤한 표정이니 과외돌이가 오히려 걱정을 한다. 기특한 녀석. 수개월 남짓한 시간 내가 정든 만큼이나 이놈도 나에게 정든 모양이다. 고마운 한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다. 내색은 않지만 나보다 더 피곤하면서도 참고 공부하는 애 앞에서 무슨 일이람. 과외를 하면서 처음으로 미안했다. 과외 준비는 물론 당일 예행연습까지, 대학 발표 수업보다 더 열심히 준비해오던 과외였는데. 나도 나태해졌나 보다. 지금 녀석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시기일 텐데.

그러고 보니 선생이란 놈이 가르치는 학생 꿈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다. 조심스레 늘어놓은 물음에 녀석은 모르겠단다. 그저 다들 공부 공부하니까 공부할 뿐 죄다 모르겠다는 대답만 내놓는다.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그럼 무엇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밝은 얼굴로 ‘탁구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녀석의 취미가 뭔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나는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요전에 수학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쌤 덕분이라고 꾸벅 인사하던 녀석에게 만족하면 큰일 난다며 잔소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저 잘했다는 칭찬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녀석에게 왜 나는 못되게 굴었을까. 고등학생 시절 듣기 싫었던 그 잔소리를 어느새 내가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과외가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나는 녀석에게 해줄 만한 따뜻한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말들은 너무나 차갑기만 하다. 참 따뜻한 말 한마디 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만 같다. 나 같은 꼰대들이 하는 말에 온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살다 보면 말이란 놈이 비수가 되어 가슴 정중앙에 박힐 때가 있다. 세월이 곧 지혜라는 격언이 보편화되다 보니 아랫사람에게 내 경험을 전해줘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다. 추석이 되면 취업 걱정, 결혼 걱정, 자녀 걱정. 나는 생각지도 않는 일들을 남들이 나서서 대신 걱정해준다. 나란 존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주면 그만 일 텐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 오지랖의 사회에 물들어가는 나의 이중성이 낯설다. 나의 세월이나 녀석의 세월이나 별반 차이도 없는데 마치 세상을 다 산 듯이 공부해야 한다고 쪼는 내가 오늘따라 낯설다. 과외돌이가 나아가는 삶과 내 삶은 전혀 다른 세상일 뿐인데, 굳이 그 거룩한 여정에 발을 담그고 싶은 사악한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순진한 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이 공부를 강요받고 있다.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내가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괴로운 하루다. 내 마음의 짐을 덜어내지 못하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다음 강의 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어야겠다. 참 이기적인 과외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