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스타그램 팔로우 신청이 왔다. 계정에 들어가 보니 내가 작년에 연락을 차단했던 지인이었다. 나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차단해 버린 사람이기에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SNS는 나의 일상이 담긴 공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한 채 요청을 방치하고 말았다.
“미워”
손절의 시발점은 느닷없이 시작된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거리도 멀고 일이 바빠 자주 만날 수 없는 지인이었는데, 한 번씩 두 글자만 담긴 카톡이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카톡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인은 대답을 회피했고 의미 없는 활자만이 오갔다. 일 때문에 답장이 늦어지면 다시 ‘미워’ 두 글자가 날아왔다. 수 차례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점점 부담이 커졌다. 지인의 감정이 나에게 내던져지는 것 같았다. 나는 불편함을 표현했고 지인은 슬쩍 말을 돌리며 상황을 빠져나갔다. 한두 달이 지나면 또다시 ‘미워’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수차례 걸려온 부재중 전화에 결국 차단을 누르며 나는 회피를 선택하고 말았다.
내가 지인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형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힘들 때는 잠시 멈춰서 주변을 돌아봐요.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주변엔 좋은 일과 인연들로 가득할 거예요. 생각보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어요.”
지인은 이 말에 큰 위로를 얻은 눈치였다. 내 의도는 관점을 바꾸어 보면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지인은 오해를 한 모양이다. 그 이후로 지인은 우울감이 들 때면 나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내가 마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았다. 쏟아지는 지인의 감정을 모두 받아내기에 내 그릇이 그렇게 크지 못했다.
이래서 인연이 참 어려운 듯싶다. 좋은 뜻에서 건넨 위로가 오해를 불러 서로의 관계를 망치기도 하니 말이다. 끝까지 받아줄 수 없으면 처음부터 위로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돌아보면 지인의 절박함을 과소평가한 나의 자만이 오히려 어긋난 인연의 시작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관계가 내 감정을 갉아먹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멀어져 버린 서로의 말은 이제 상대방에게 닿기에는 늦어버렸다.
감정이 제로썸이 되는 인연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좋은 관계는 서로의 감정에 시너지를 불러올 수 있는 관계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입장을 조금 제쳐두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 아닐까. 나의 욕심을 타인에 투영하는 순간,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쉽다.
옛 동화에서 의좋은 형제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몰래 쌀을 옮겼다. 그리고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우애가 더 깊어졌다. 상대방을 위하는 만큼 상대방의 진심이 돌아와 결국 나를 채워준 것이다. 인연이란, 상대를 배려할 때 오히려 내가 더 얻어가는 참 아이러니한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