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니, 사요나라.
다섯 번째 밤이 아니라, 돌아가기 직전의 새벽이 여행의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여행은 언제나 밤이 아니라 아침으로 끝난다.
새벽 여섯 시,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말없이 짐을 싸고, 바닥을 훑고,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일본식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밀어보며 이 집의 리듬을 마지막으로 몸에 담았다. 분리된 두 개의 방, 숨을 곳과 모일 곳이 분명했던 구조, 필요 이상의 물건이 없는 수납. 우리는 삼일 밤을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잠만 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했다는 감각이 남는다.
첫날의 호텔과 둘째 날의 레지던스. 어린 시절 여행 패턴으로 호텔에만 익숙했기에 춥다며 투덜거리던 아들을 향해 우리가 고수했던 건 같은 말, 같은 태도였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남편은 호텔을 다시 알아봤지만, 아이가 이 공간에 마음을 붙이길 바랐다. 그래서 드라이기로 온몸을 데워주었다. 설득보다 먼저 도착한 건 따뜻함이었다. 키는 아빠보다 훌쩍 커 180을 향하지만, 마음과 생각은 아직 감당하며 자라 가야 할 방향이 한참 남았다. 토라진 마음과 성에 차지 않는 환경으로 입에 뿔이 나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아들과 그 아들의 몸을 데워주기 바쁜 남편을 향해 나는 이곳에 머물고 싶다고, 주방과 세탁기가 필요하다고, 생활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흘렸다. 사춘기를 훌쩍 넘기는 듯 한 아들은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두고 받아 적는다.
3일째의 교토 일정을 마치고 편의점 쇼핑을 한 후 숙소가 보이던 밤길에서 아들이 말했다.
“우리 숙소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너스레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적응이 있었다. 사람은 설득으로 변하지 않고, 머무른 시간만큼 변한다는 걸 아이를 통해 다시 배웠다. 부모의 가치관은 설명이 아니라 반복으로 심긴다. 조용히, 일관되게, 사랑으로. 세탁을 하며 마른 옷을 정리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도 하지만, 조용히 다가와 옷 정리를 돕기도 한다. “빨래할 수 있는 숙소도 좋네.” 무심하게 흘리고 가는 한 마디에 웃음이 빙그레 번진다. 그래, 늘 시간이 필요하더라. 엄마만 잘 기다리고, 믿고 참으면 되는 건데.
아침, 벤 픽업시간이 다다르니 아이들의 돕는 손이 더욱 필요하다. 딸에게 냉장고에 남은 먹거리를 담아달라고 했다. 숙녀로 자라 가는 아이는 놀랄 만큼 야무지게 봉투를 나누고, 무게를 가늠하고, 빈 공간을 채웠다. 아들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방을 훑었다. 귀찮음과 책임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나이가 참 사랑스럽다. 두 아이와의 오사카 여행이,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 성큼 자란 아이들 안에 심겨진 태도와 소소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는 습관, 사람과 주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며 남편과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윙크를 찡긋 하는 횟수가 늘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딸이 이번 방학엔 꼭 나와 제빵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쿠키를 굽고 싶다며 종달거렸다. 나는 이미 다음 주의 장면을 떠올렸다. 바쁜 일들을 정리하고, 아들을 위한 식탁을 차리고, 딸과 오븐 앞에 서는 저녁. 여행은 늘 미래의 일상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아, 방학 중 꼭 집에 초대하고 싶은 엄마와 딸 친구가 있었는데 함께 미리 쿠키를 구워 정성스레 포장을 해 두어야겠다. 값비싼 브랜드보다 때로는 시간과 정성을 들인 선물이 마음을 전할 때 따스함이 더 진하게 전해지기도 함을 가르쳐주고 싶다. 밤새 컨설팅 신청이 하나 들어왔다. 돌아갈 일상이 있다는 신호 같았다. 아이들의 공간,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집과 동네. 그래서 여행은 도피가 아니라 확인이다.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지키고 싶은 사람인지.
다섯 날 전,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태워주었던 벤 기사님이 이른 아침 다시 공항으로 데려다주었다. 첫날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야경도 좋았지만, 이른 아침의 청명한 공기와 일상의 풍경도 정겹다. 떠날 때가 되니 눈에 담고 싶은 시간이 길어져 택시 안에서의 대화는 줄었지만 4박 5일 동안 두 번이나 짐을 옮겨준 기사님에게 오사카 인사는 꼭 건네고 싶다.
“오-키니.”
짧은 인사에 마음을 담아 건넸다. 고맙다는 말은 이 도시에서 늘 생활의 언어였다.
오사카와 일본 열도를 바라보며 이동의 의미를 생각한다. 여행은 장소를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 멀리 왔다고 해서 더 깊이 아는 건 아니고,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바람, 구조, 태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간격. 이곳은 소리보다 여백으로 말하는 나라였다. 또 한 사람의 언어를 빌리자면, 인간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회복된다. 아이들이 적응해 가는 시간, 부부가 선택을 조율하는 순간, 가족이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통합되어 갔다. 여행은 우리를 흩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방향으로 모이게 했다.
차창 밖으로 오사카의 아침이 지나간다.
사요나라.
떠남은 끝이 아니라, 다시 살기 위한 준비다.
돌아갈 곳이 있어 이 여행은 값지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꺼이 길 위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