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엄마가 된 미혼모
여러 해 동안 미혼모 엄마들과 만나왔다.
10대와 20대 초반의 예비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던 미혼모 시설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024년 7월 출생통보제가 시행되면서, 반드시 보호자가 신고하지 않더라도
의료기관과 지자체가 출생 사실을 통보하고 등록 절차가 진행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생 자체가 기록되지 못해 사회 밖으로 밀려나던 아이들을 막기 위한 제도다.
요즘 시설에는 40대의 예비 엄마들도 제법 보인다.
홀로 숨죽이며 출산을 감당하기보다, 시설에서 지내며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는 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관의 사회복지사들은 조심스러운 우려도 함께 이야기한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늘 같다.
아이의 아버지가 엄마와 아이를 책임지고, 세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우리는 거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비 산모들은 시설에서 두 갈래의 선택 앞에 선다.
아이를 낳은 후 입양을 보내거나 보호시설로 보내는 길.
혹은 영유아 시기 동안 사회복지의 보호 안에서 지내며 직업 교육을 받고, 아이와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는 길이다.
그 선택의 문 앞에서 나는 한 엄마를 만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오래된 결핍 위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엄마와 함께 친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있는 집이었지만 그 집은 보호의 공간이 아닌 학대와 유린의 공간에 가까웠다.
엄마 역시 누군가에게 보호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을 지켜낼 힘도 없었다.
딸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삼촌과 잠자리하는 엄마를 보고 자랐고,
딸 역시 자란 후 대물림된 성학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어린 딸은 늘 마음속에 한 장면을 그렸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 서로의 하루를 묻는 목소리, 온정적으로 같은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사귀던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을 때였다.
아이를 가지면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가 생기면 남자도 책임을 느끼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상상했던 장면과 달랐다.
열아홉에 엄마가 된 그녀에게 남자는 가끔 찾아왔다.
아이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잠자리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번도 엄마와 아이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늘 남자를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는 한 가지 문장을 떠올렸다.
관계의 기본값.
누군가에게 가정의 기본값은 ‘함께 책임지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정의 기본값은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것’ 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기본값은 존중이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의 기본값은 소유나 욕망일 수도 있다.
그녀가 믿었던 사랑의 기본값과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관계의 기본값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좌표 위에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아이를 낳기로 선택했다.
외로움을 끝내기 위해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가정이 만들어지지 않자 아이의 의미는 조금씩 달라졌다.
사랑받아야 할 존재였던 아이는
엄마의 삶을 가볍게 만들지 못하는 짐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
엄마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야 했다.
그래야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아이는 조용히 방치되기 시작했다.
말을 배우는 속도가 느려졌고,
눈을 맞추는 시간이 짧아졌다.
낯선 사람에게 과하게 달라붙거나,
반대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발달 지연과 정서적 어려움은
대개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결핍의 반복 속에서 시작된다.
아이는 아직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어떤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믿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을.
아기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안다.
언어가 아니라 분위기로, 눈빛으로, 손길의 온도로 세상을 읽는다.
누가 자신을 기다리는지,
누가 자신을 귀찮아하는지,
누가 결국 떠날 사람인지.
출산 후 그녀는 아이와 함께 영유아 자녀 동반 보호시설로 들어왔다.
시설에서의 삶은 규칙이 분명하다.
아이를 돌보고
교육을 받고
조금씩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한다.
어떤 날은 그곳의 풍경이
아주 조용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책임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의 기본값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누군가는 사랑받으며 자라
존중이 관계의 기본값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버텨내며 자라
버려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엄마들은
사랑받기 위해 아이를 낳는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마가 되기도 한다.
그 마음을 나는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그 또한 너무 오래 외로웠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더 오래 바라봐야 할 존재가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세상의 기본값을 배우기 시작하는
한 명의 아이다.
아이에게 가정은
세상이 처음 열리는 장소다.
그곳에서 아이는 배운다.
사람은 나를 기다리는 존재인지,
사람은 결국 떠나는 존재인지.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이 질문 앞에 멈추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기본값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기본값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오늘도, 우리의 관계 속에서 세상이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