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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승범 Aug 03. 2016

알프스에서 마주한 악흥의 순간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아마 스물 일곱이었을 것이다

'해외 여행을 다녀오면 보는 눈이 커진단다'코웃음 치던, 사람들이 하던 이 이야기를 한번 믿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어느새 서른 둘이다.

20대를 살아가는 친구들을 만나면 주제넘지만 말하곤 한다.

'한살이라도 어렸을 때 더 많이 다녀봐'


그리고 그렇게 올해도 어김 없이 공항으로 발걸음을 한다. 목적지는 스위스 베르비에.






8월의 유럽은 각종 음악축제로 수놓아 지는 기간이다. 잘츠부르크, 루체른, PROMS, 에든버러, 베로나, 바이로이트 등등 내로라하는 곳에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베르비에다. 이 곳은 겨울철 스키로 유명한, 스위스 알프스 중턱에 위치한 작은 마을쯤 되는 곳인데 다른 음악 축제처럼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매년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이곳을 찾아 관객을 마주한다.


궁금했다.

이 작은 마을이 어떻게 대표적인 여름 음악축제가 되었을까?

교통도 불편한 이 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어떤 생각으로 올까?

때마침 휴가의 시기가 맞았기에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이 곳을 방문하기로 해본다.






알프스의 여름은
악기도 어루만진다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처음 만난건 싱그러운 날씨였다. 청명한 시야는 물론이거니와 온도, 습도 모두 사람들의 미소를 절로 부를 공간이었다. 서울로 치면 아주 좋은 가을 날씨쯤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알프스는 비단 사람들의 마음만을 감싸줄 뿐 아니라, 악기도 어루만져준다.  악기는 온도 습도에 큰 영향을 받는데 사실 한 여름엔 이를 컨트롤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에어컨 빵빵한(?) 실내 공연을 한다해도, 바깥 날씨가 좋지 않으면 소리의 질감이 어딘가 다름을 느낄 때가 종종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르비에는 이런 걱정이 없다. 계절상 한여름임에도 관객에게 음악가에게 그리고 악기에게 완벽한 곳이었다.


스위스 베르비에 중심부



황홀한 연주자들
눈앞에서


올해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는 샤를 뒤투아가 맡았다. 게다가 개막공연의 협연자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정경화 선생이었다.

그로부터 이어지는 향연들, 그리고리 소콜로프, 슈태판 겐츠, 안드레아스 오텐잠머, 다닐 트리포노프, 마르크 안드레 아믈랭, 유자왕, 예루살렘 퀄텟, 안드라스 쉬프, 다니엘 호프,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고티에 카퓌송, 리즈 드 라 살, 조슈아 벨 등의 연주를 만날 수 있었다.

더불어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지휘자들의 면면도 대단한데, 언급했던 샤를 뒤투아를 비롯 파보 예르비, 마이클 틸슨 토마슨, 이반 피셔, 다니엘 하딩 등이 알프스를 찾았다.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린 마을 교회 무대






관객에 친절한
프로그램들


저녁 공연 1시간전 공연장 주위 두 곳의 카페에선 공연에 대한 프리렉쳐(pre-lecture)가 이뤄진다. 한 곳은 영어로, 다른 한 곳은 불어(베르비에는 불어가 메인인 곳이다)로 이뤄진다.

할아버지(Stephen Johnson)인 연사분은 DJ같은 모습으로 음악도 들려주고 피아노도 직접 치면서 관객들에게 곡에 대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유머러스한 감각도 있어서 관객들의 집중이 아주 좋은 편이다.


저녁 공연 전 프리렉쳐



뿐만 아니라, 연주자들과의 대담도 종종 열려서, 연주자들이 가진 철학, 곡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불어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영어로 이뤄질경우 미리 표시해준다)


이런 프로그램도 훌륭하지만 관객들을 위해 매일 브로셔를 만들어 배포하는 조직국의 부지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비에의 모든 호텔에 아침이면 그날의 축제일정이 빼곡히 있는 브로셔가 배달된다. (무료로 제공된) 기본책자도 훌륭한데, 세세하게 다시금 알려주는 꼼꼼함은 관객들에게 참 고마운 점이다.


매일 아침 호텔로 배부해주는 브로셔




베르비에 축제의
뚜렷한 색깔은
교육(Academy)이다



베르비에의 하루는 정말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전 공연, 저녁 공연 이렇게 두개씩 일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정작 이 곳에서 받아본 일정표는 하루가 가득 채워져있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날, 이 축제가 가진 정체성이 바로 교육(Academy)임을 알 수 있었다.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VFO)는

젊은 연주자로 이루어진 악단

유수의 지휘자, 협연자가 알프스로 찾아오고있지만 사실 축제를 대표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18-29세로 선발된 젊은 음악가들이다. 그들중 아마추어도, 프로도 있을테지만 아직은 온전히 영글지는 못한 어린 연주자들인 것이다.


100명이 선발되는데 이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정말 기라성 같은 지휘자, 협연자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도제식 교육으로 대표되는 음악교육에서 이러한 연주 경험은 그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주 최강 사운드를 표방하는 느낌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나 유수의 오케스트라 단원 그대로 등장하는 여타의 음악축제와는 기본적인 궤가 다른 것이다.

만약 최고의 유럽사운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싶다면 이곳이 적합한 선택지는 아닐 수 있다. 몽글몽글 피어나곤 있지만 덜 여문 사운드는 숨길 수 없고, 간이로 지어진 콘서트홀의 음향의 아쉬움은 분명 상재하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끝난 후


하루의 문을 여는 마스터 클래스

베르비에의 아침은 공연도 강연도 아닌 마스터 클래스로 시작된다. 정식 공연은 11시 교회에서 열리지만 이미 마을은 그 전부터 생기가 넘친다.


오전 9시에서 9시30분까지 곳곳에 위치한 장소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성악 등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린다. 흘러가는 레슨의 분위기에 따라 젊은 연주자들의 얼굴엔 고민, 좌절, 기쁨, 감사의 모습이 피어오른다.


한번은 피아노 마스터클래스를 청강하였는데 대상자는 시작 30분전부터 계속 연습을 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관객들도 그녀에게 잘한다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Sergei Babayan)이 등장했고, 한시간여 동안 말 그대로 산산조각나듯 지적받았다. 다음 공연이 있어 미리 나와야했었는데, 우연히 건물 밖 구석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심에 찬 얼굴로 쪼그려 앉아있는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 중


사실 이런 마스터클래스는 음악가나 관계자가 아니면 참관하기가 쉽진 않은데, 이 곳에선 일반 관객들이 주가 되어 청강한다.


눈 앞에서 원포인트 레슨을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음악가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악보의 노트 하나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숨겨진 작은 공연들

이 마을에는 영화관이 하나있다. 딱 봐도 엄청 오래된 것 같은 작은 마을 영화관느낌이다. 영사기를 돌려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 곳에서 매일 오후 4시반이면 어김없이 공연이 열린다. 베르비에 아카데미 교육을 받는 어린 학생들이 곡들을 발췌해서 연주를 들려준다. 아직은 무대가 익숙치 않은지 인사하는 것 조차 어색하지만 관객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쳐준다.


영화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또 한가지, 많은 이들이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밤 11시.

마을 교회에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음악을 들려준다. 밤 9시가 되서야 해가 지는 알프스 여름의 밤은 짧지만, 그들은 그 짧은 밤마저 더 아름답게 수놓을 만한 연주를 들려준다.


어린 학생들도 젊은 단원들도, 애호가들과 동료 음악가들 앞에서 가지는 연주 기회가 더없이 소중할테다. 그리고 성장하는 씨앗의 거름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마종기, 꽃의 이유 中


마을이 하나의 음악캠프같은 이 곳 베르비에, 학생들, 연주자들, 관객들이 작은 공간에서 어울리는 이 곳.

이 곳의 가장 큰 매력은 피어 나는, 여물어가는 꽃들의 웃음, 아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겠다.

유수의 연주자들의 빼어난 연주도 무척이나 인상깊고 축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함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보단 자라나는 젊은 연주자들의 모습, 싱그러운 열정이 더 각인되는 곳이다.


둘째날 저녁 공연 1부가 끝난 후 화장실에 가던 찰나 모여있던 한국 연주자들의 대화를 지나가며 들을 수 있었다. 끝나고 피자 먹자는 이야기 였는데 '피자염, 피자염' 하더니 옆 연주자가 '저염식' 말장난을 하던 즐거운 모습이었다. 꿈 많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생기 넘치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같았다. 이런 점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이 축제가 가진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아닐까.


우리 눈엔 어느 순간 꽃은 피어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어느 순간 져버린지도 모른채 기억속에서 사라지곤 한다.

봄눈에서부터 서서히 성장통을 겪어가며 화려한 꽃이 되기도하지만 잘 보이지 않은 작은 꽃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론 피지 못한채 그대로 저무는 경우도 있을테다.


꽃이 필 땐 그냥 피지 않는다. 작지만 꽃나무 전체가 흔들리는 그런 과정이 수반되어야할테다. 이런 모습을 베르비에에서는 만날 수 있다. 멋진 음악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관객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과연 이러한 점이 비단 음악가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일까?

우리네가 살아가는 모습도 비슷할 것이다. 베르비에는 음악을 통해 음악가들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주고있다.




편집자 주

- 이곳은 단지 음악을 넘어 따뜻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즈 공연,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도 있어서 유럽의 가족단위 관광객도 많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사방이 알프스로 둘러 쌓인 천의 환경만으로도 충분한 이 곳입니다.

아직 일정이 사흘정도 더 남아있는데요, 순간순간, 진심을 다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깊이 가져봅니다.


리사이틀, 챔버 공연이 열리는 교회당


공연 전 콘서트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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