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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7. 2021

<에너미>

드니 빌뇌브, 2013


 

 도플갱어는 서로 만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

 왜냐면 둘이 둘이 아닌 하나였음이 밝혀졌으므로 

 이제부터는 하나의 인생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드니 빌뇌브의 2013년작 <에너미>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제이크 질렌할의 얼굴을 공유한 한 쌍의 도플갱어 아담과 앤소니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아담과 앤소니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장면은 두 번 나오는데 처음은 낯선 호텔방에서, 다음은 아담의 아파트 실내에서. 두 번 다 외부와는 차단된, 둘만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으슥하고 어둑한 공간이다.

 제 3자가 똑같이 생긴 아담과 앤소니를 한꺼번에 목격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앤소니의 아내 헬렌이 이 두 남자에 대한 놀라운 진실을 깨달을 때에도 한 남자를 바라볼 뿐이며 그조차 간접적인 방식이기에 말 그대로 한 남자가 1인 2역을 하는 것 같은 찜찜한 여지를 남긴다. 왜냐면 제 3자가 직접적으로 도플갱어를 목격할 경우 이 영화의 도플갱어가 SF같은 뉘앙스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도플갱어는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어둑하고 으슥한 내면의 고립된 장소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심리극의 느낌으로 향하고 있다.



 아담은 역사를 가르친다.

 그에게는 매력적인 연인 마리(멜라니 로랑)가 있다. 그의 아파트에서 마리와 나누는 격렬한 섹스와 단절된 대화, 침묵이

 그가 강의실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두 번의 장면과 번갈아 교차된다.

 섹스 대신 말하는 중인 그는 같은 내용을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은 컨트롤(통제)에 집착해왔다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연인을 가졌음에도 그는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컨트롤하고 있는가? 혹은 자신의 자아를, 욕망을...


 동료가 난데없이 어떤 영화 한 편을 아담에게 추천해준다.

 왜 이딴 시시한 영화를 추천했을까? 아담은 보고나서 어이없어하지만 마리와의 섹스에 실패한 직후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다시 그 영화를 쳐다본다.

 영화 속 스쳐 지나는 엑스트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앤소니를 발견한다.

 그 영화를 추천한 동료는 알고 있었을까?

 아니 몰랐을 것이다. 그 영화를 보며 무의식에 각인된 엑스트라의 얼굴이 그와 같은 얼굴을 지닌 아담과 동석한 시점에 자아의 통제를 뚫고나와 아담에게 그 영화에 대한 얘기를 꺼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다.



 앤소니에게 접촉하려는 아담의 시도는 앤소니의 아내 헬렌으로 하여금 남편이 외도 중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헬렌은 남편의 다른 여자를 찾으려는 애초의 목적이 빗나가서? 남편 앤소니와 같은 얼굴을 한 다른 남자 아담을 찾게 된다.

 아담은 아직 헬렌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임산부 헬렌(사라 고든)을 지그시 바라본다. 따스하게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다.


 아담의 연인 마리를 연기한 멜라니 로랑과 앤소니의 아내 헬렌을 연기한 사라 고든은 원래도 아름다운 배우이지만 이 영화에서 유난히 아름답게 찍혔다. 두 명 모두 노출씬이 있다. 이 두 명의 여성은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씬들보다 더욱 중요하다.

 앤소니는 마리를 원하고 아담은 헬렌을(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원한다.

 사실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성립 순서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마리를 원하고 마리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헬렌을 원하고 헬렌과의 삶을 바라는 욕망이,

 서로 충돌하면서 하나의 내면을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시켰고 그로인해서 두 명의 남자 아담과 앤소니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담을 발견하고 돌아온 헬렌은 남편 앤소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모종의 책임을 추궁하다시피 한다. 아직 아담을 만나기 전 시점의 앤소니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당신은 알 거라고 당신은 알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한다.

 그녀는 이미 두 남자를, 앤소니와 아담을 분리된 존재로 대하고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은 컨트롤에 집착해 왔다.

 역사는 반복되며 개인의 내면에서 또한 반복될 수 있다. 개인은 개인의 삶을 일관된 의지로 선택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자기 안에 혼재하며 충돌하는 온갖 정보와 감정과 욕망들을 컨트롤할 필요가 있다.

 선택은 잔인하다. 때때로 나는 나의 독재자가 되어야만 한다. 분열된 나와 내 삶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배제시켜야 할 나 자신과 그에 연루된 삶까지 학살해버릴 필요가 있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말이다.

 그럼 그것으로 해결된 것일까? 학살은 끝났으니 이 조그만 뇌 속 땅덩어리는 평화를 되찾았을까? 영화에서는 '거미'로 대표되는 뜬금없는 장면들이 튀어나와 당혹감과 혼란을 유발한다. 그 장면들을 이면의 의미심장한 무엇으로 (성급히) 대체해버리기 이전에 그 이미지 자체로서 전달하려 했던 당혹감과 혼란을 고스란히 응시해보자.

 '혼돈은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

 해석(통제)된 이후에도 질서 너머에는 또 다른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앤소니를 만난 직후 아담은 어머니(이자벨라 로셀리니)를 만나서 자신에게 형제가 있느냐는 식으로 질문했다.

 어머니는 부정하면서 너는 나의 유일한 아들이고 나는 너의 유일한 엄마라고 답했다.

 어머니의 말은 진실했다. (나는 아담 뿐이 아니라 앤소니 역시 이자벨라 로셀리니의 유일한 아들일거라고 확신한다.)

 허나 그때만큼은 어머니가 아닌 다른 두 여자로 인해 분열하고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는 두 남자였던 셈이다.


 이제 두 남자는 한 남자로 복귀했고 다른 한 남자는 다른 한 여자와 더불어 죽었다.

 그런데 그가 남긴 열쇠가 여전히 호주머니에 남아있으니 그 열쇠는 그의 비밀스런 방으로 통한다. 감춰야만 하는 욕망을 감춘 감춰진 방. 내 생각에 그 방으로부터 도플갱어는 언젠가 또 부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감춰진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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