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들의도시(2008), 세븐싸이코패스(2012), 쓰리빌보드(2017)
내가 본 마틴 액도나가 각본쓰고 연출한 영화는 세 편이다.
킬러들의 도시, 세븐 싸이코패스, 쓰리 빌보드
아마 기억하기로 세 편 모두 영화 속에서 '간디'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아니더라도 대신, 간디의 길을 걸어가는 듯한 인물은 세 편 다 등장한다.
킬러들의 도시(원제: 브뤼헤에서?)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주인공이 있다.
그래서 그 죄를 심판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인물이 있고 또 용서하고 갱생의 기회를 주려는 인물이 있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대신 벨기에 브뤼헤를 무대로 펼쳐지는 '죄와 벌'이라고 별명 붙일만 하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비교적 플롯이 복잡해진 모습이지만 작품의 중요한 소재 '둘'만 고른다면
'싸이코패스'와 '애완견'이다.
마치 싸이코패스를 등장시키되 애완견은 절대 죽이지 말라는 헐리우드의 역설적 요구에 응답하는 영화인 것 같다. (미국, 한국할 것 없이 많은 여성관객들이 싸이코패스의 인명학살은 그러려니 해도 예쁜 애완견이 죽으면 진심으로 영화에 화를 낼 것이다.)
물론 약간의 냉소가 깃든 응답이라 싸이코패스든 애완견이든 희극적인 맥거핀에 가깝다.
그 희극적인 분위기에서 영화가 도달하는 목적지는 사람의 폭력이나 죄, 그래서 사람의 사람에 대한 복수와 심판과 정의...
그리고 사람의 사람에 대한 용서와 이해, 포용이다.
쓰리 빌보드는 말할 것조차 없을 것이다.
작품의 테마에서는 이하동문이라 떼울 수 있을 정도다.
적어도 내가 본 세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유난스러울 만치 일관적인 테마를 고집해 온 것 같다.
사실 또 일관적으로 연극적인 배경과 인물과 플롯이 아니었던가, 싶다.
영화 속 배경이 사실적으로 보여도 관객이 한 눈에 관망하며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압축적이고 통합적인 무대의 특성을 지닌다.
인물들도 무대 중심에서 일어난 사건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관점에 직접적으로 부응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이 한정된 무대와 인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반응하고 인과하면서 예의 그 일관적인 테마로 모아지는 플롯을 '극 안의 요소'들에 충실하게끔 구축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섣불리 무대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고 이미 주어진 무대와 사건과 인물들을 되짚으면서 '그곳과 그 일과 그들'에게 다층적인 깊이를 누적시킨다. 그 결과 관객들은 흔히 말하는 개연성이나 핍진성까지 충족된, 잘 짜여진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당연하게도 극화된 극적인 리얼리티다.
연극적이라고 해서 나쁜게 아니다.
문학적이라고 해서 회화적이라고 해서 그 영화가 나쁜 게 아니듯.(물론 문학적인 쪽보다 회화적인 쪽이 영화적으로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긴 하다.)
어쨌거나 영화는 그 모두가 될 수 있고 영화적으로 다양한 이질성과 개성이 잘 조화되면 그만이다.
개인적으로 '킬러들의 도시'는 심플하고 미니멀한 극적구성을 깔고 영화의 스타일이 잘 녹아들었다고 느꼈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헐리우드적인 배경에서 더욱 헐리우드적인 장르 스타일과 조금 부조화를 이루지 않나? 의심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어느 누가 말했듯 마지막이 좋으면 관객들은 용서한다!
나 역시 그 영화의 마지막이 맘에 들었으므로 그 고집스런 간디의 진정성은 와 닿았다.
간디가 중요하다.
여기 언급한 그의 영화들에서는, 간디라고 퉁칠 법한 그 '선한 인물'들이 너무나 중요했다.
악한 인물보다 선한 인물이 만들거나 표현하기에 수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면 그 선한 인물이 단지 착해빠졌을 뿐이라면 그 선함은 앞서말한 한정된 무대와 사건과 인물들을 되짚어서 작품의 다층적인 깊이를 쌓아나갈 힘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빗대었는데 그의 또 다른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형제 중 막내 알료샤라는 지극히 선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선한 알료사는 바보처럼 착해빠진 게 전부가 아니다. 놀랍게도 그 작품속 수두룩한 악당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과 타인을 의심하고 부정하게 된 복잡한 미로를 섬세하게 되짚어 (긍정의 탈출구를 열어놓고) 나아가 그들과 자신 사이에 놓여있는 선악의 벽을 어느정도 해체시켜 버린다. 그가 바라보는 이해와 용서와 포용의 시선으로서 그 작품속의 어느 인물들도 단순히 선하거나 단순히 악한 것만은 아니게 된다.
마틴 맥도나의 영화들에서도 이 비슷한 선한 인물들이 다소 간디스럽게 등장해왔는데,
그것이 마냥 간디처럼 허황되게 느껴지느냐
그것이 진정 간디처럼 위대한 진정성을 발휘하느냐, 그 갈림길은
작가 본인이 작품 밖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유의 깊이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간디스런 인물들은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이 투영되어, 가장 작가적인 관점에 근접해있을 것이다.
그 결과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이라고 (관객에 따라)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는데
그 간디스런 인물 자체가 나름의 깊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적어도 극화된, 극적인 리얼리티는 또 가능할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워도 작품 안에서 그 선한 인물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마틴 맥도나의 영화들은 연극적 일관성과 간디스런 인물과 테마의 일관성을 지속해왔고
느와르나 스릴러 같은 헐리우드 장르에 그런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장르 관습을 와해하거나 장르의 피상성을 극복해왔다.
쓰리 빌보드에 이르면 연극적인 미장센은 거의 완벽히 영화적인 미장센으로 조화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는 그 간디스런 감동이 많은 관객들에게 힘을 발휘해왔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길을 걸어갈지 모르겠다, 만약 간디가 없다면, 간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서로 의심하고 심판하고 부정하는 인물들과 그야말로 사실적인 스타일만으로 그의 영화가 여전히 간디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현실의 관객들에게?
모르겠다. 모르긴 모르지만 간디에게도 그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