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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과위생사 이주화 Nov 23. 2022

#2 우연에서 멈출 것인가? (4)

야생동물처럼 배운 일본어

일본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려 한다. 유학에 대한 첫 질문이 대부분 일본어 실력인 것은 아마 언어가 준비되지 않으면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외국어 공부를 하자는 게 아니라 꼭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마음만 준비되어 있다면 못 해낼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떻게든 되겠지

집은 어떻게든 구했고 대학원은 개강을 하면 가면 되는 일이었다. 이제 그다음에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생활비였다. 언제까지나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었고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해외송금 시 발생하는 수수료가 꽤 컸기 때문에 100만 원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실제로 받아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8만 엔 정도였다. 많은 돈이 공중에 흩날리는 것 같아 일본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못하는 외국인도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보쿠덴'이라고 하는 한식당에서의 아르바이트 모집이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식당이라면 한국인이 한 명쯤은 있겠지! 그러면 내가 일본 생활이 어려울 때 가끔 손을 빌릴 수 있겠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눈은 나의 구세주와 같은 번역기 '파파고'를 켜놓은 노트북을 향한 채로 한식당에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일정을 잡기 위한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 실제로 마주하면 그래도 손짓 발짓을 섞어서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텐데 유선 상에서는 오직 말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대화의 10%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력서'라는 단어와 날짜, 시간은 이해했기 때문에 다행히 면접에 갈 수 있었다. 

이력서에는 펜으로 꾹꾹 눌러서 부탁 하나를 적었다.

'일본어를 잘 못하니까 제발 설거지하게 해 주세요' 


면접 자리에서는 최대한 똘망똘망해 보이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간절함, 그 자체였다. 다행히 곧 한식당에서 합격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눈빛이 잘못 전달되었나 보다.

첫 출근날, 당연히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맡게 될 줄 알았던 나에게 주문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저 혹시... 홀 담당인가요?"


아뿔싸.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홀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안 한다, 못한다 소리를 할 입장은 못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외국인이라는 것이 티가 나지 않도록 능숙하게 일하자.


명찰에 쓰인 이름 때문에 외국인임을 들키는 날도 있었다.

외국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말자는 미션을 만든 것은, 그렇게 해야 내가 일본어를 얼른 습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에도 반말과 존댓말이 있는 것처럼 일본어에도 높임말이 있었는데 가뜩이나 일본어도 서툰데 존댓말까지 적절하게 사용하려니 어려움 투성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식당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내어올 때 '맛있게 먹으세요'라고 이야기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듯, 일본어로도 '食べて下さい(타베테쿠다사이)'라는 표현 대신 맛있게 드세요와 비슷한 의미인 'お召し上がり下さい(오메시아가리쿠다사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했다.

10글자나 되는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해야 한다니. 

'~해주세요'라는 말의 쿠다사이는 익숙하니까 내가 외워야 하는 말은 앞의 '오메시아가리'였다. 

'그래. 먹는 거니까 아가리라는 표현은 연상할 수 있어'

문제는 오메시였다. 

표현을 다 외우고 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손등에 '오메시'라고 써놓고 음식을 서빙할 때마다 커닝을 하며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때까지 연습을 했다.


주문을 받을 때에는 많은 메뉴를 받아 적어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나라 말로 받아 적으면서 한국인임이 티가 나고는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한국에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받아 적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히로시마에서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응원의 말을 전해주고는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름표를 보지 않고서는 한국인임을 들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물론 나에게 너무 어려운 설명을 요구할 때에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드러내 위기(?)를 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 부대찌개는 언제 먹으면 돼요?'라는 질문에 '보글보글 끓으면 드세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보글보글'도 '끓으면'도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었다. 그때에는 '죄송합니다만 제가 한국인이라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요'라고 이야기했는데 다행히도 직원의 부족한 설명에 불만을 갖기보다는 '현지인이 가져다주는 한식이니 현지에서 먹는 음식과 맛이 비슷하겠지!'라는 기대로 만족하는 손님들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 말로 생각하면 엄청나게 간단한 설명도 일본어로 할 수 없는 나였지만, 무사히 홀 서빙 업무를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는 점장님, 직원 분들과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내가 인생에서 어려운 결정을 할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 있는데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해본 경험이라도 남길 수 있도록 해보자'이다.


무모하고 힘든 일도 우선 시작하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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