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만든 것이, 결국 나를 강하게 한다.
여름의 후텁지근한 기운이 사그라들고 가을의 시원한 공기가 이를 대체하는 계절의 교차로에서, 내 마음은 종종 갈 길을 잃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에는 마들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과자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나에게는 여름에서 가을로 이동하는 공기의 변화가 그렇다. 평소처럼 입고 나온 반팔 티셔츠의 아래쪽 팔에 오싹 소름이 돋는 순간, 닭살과 함께 외로움이 비죽비죽 올라온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내게 공포였다.
어린 시절, 나는 지독히 외로웠다. 사계절 내내 외로웠지만, 더위로 아득해진 정신이 시원한 바람 덕분에 또렷해지면 외로움이 한층 깊어졌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외로움에 잠식당해 눈물짓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이 문장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결과가 그렇듯, 외로움에도 여러 원인이 얽힌 탓일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나의 마들렌을 살펴보지 않았다. 마들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맛보면 끝없이 무너질 것 같았다. 외로움을 기생충처럼, 나는 기생충의 숙주가 된 것처럼 그냥 받아들였다.
"엄마가 미안해. 어린 시절의 너를 조금 더 따뜻하게 안아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하나뿐인 딸이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너무나 소중했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씩씩하게 버텨내는 강한 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 너무 어린 나이부터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게 해서 미안해."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마들렌을 꺼내어 베어 물었다. 마들렌을 살펴보고 먹는 것이 이렇게 슬픈 일인가. 어릴 적 지닌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타인 앞에서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그 타인은 내가 사랑하는 엄마다.
딸로서 나는 감정을 보이면 안 되는 존재였다. 감정을 보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탓이다. 어린아이가 할 수 없는 일도 반드시 혼자 해내야만 했고, 아파도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무조건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었다. 억울함을 토로하기 전에 부모님은 이미 내 편이 아닌 친구들의 편이고 선생님의 편이었다. 그럴 때마다 세상에 나는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께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기에, 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책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첫 생리를 시작했을 때 흐르는 피에 당황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억지로 누르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네가 알아서 해." 생리대를 어떻게 붙이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결국 새빨간 피로 속옷이 물들었다. 처음 마주한 경험, 붉은 피, 무력감 등이 뒤엉킨 채로 오랜 시간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었다.
늘 그랬듯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툭하면 외로움을 느낄까. 나는 왜 남들처럼 강하지 못할까. 나는 약해서 외로움을 느꼈고, 외로움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 위의 닭살을 바라보며, 문득 내 감정을 부모님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세상의 중요한 일은 수동적인 계기가 아닌, 능동적인 결심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날의 경험이 그렇다.
"엄마, 나 사실 많이 외로워. 항상 멋진 딸이 되고 싶어서,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이제는 내가 아닌 척하기 힘들어. 친구에게 기대지 않고, 가족에게 기대고 싶어. 기대지 않는 강한 딸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더 이상 마음이 힘들어서 안 되겠어. 부족한 모습도 사랑해줘."
어느덧 부모님께 혼나는 일보다, 부모님이 받는 상처가 두려울 나이. 그 두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고, 내 마음속 이야기를 전했다. 그 순간은 지극히 나만 생각하는 못되고 이기적인 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가 내 앞에서 우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의 진심을 들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실은 우리 가족 모두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고, 나는 부모님에게 지나치게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는 부족함 없을 만큼 완벽한 가족이지만, 그 겉모습을 유지하는 과정 속 각자의 위치에서 사실은 모두가 외로웠다. 밤마다 방문을 잠그고 엉엉 우는 내 모습을 부모님이 모르셨듯, 나 역시 부모님이 눈물짓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 속마음을 전하고, 부모님을 이해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맛있는 마들렌도 먹지 않으면 유통기한이 지나 썩기 마련이다. 사람의 모습이 제각각이듯, 사람이 지닌 마들렌의 크기도 다르다. 당신이 지닌 마들렌이 작든 크든, 나는 그 마들렌을 꼼꼼히 살펴보고 맛있게 먹기를 바란다. 인생에는 타이밍이 있다. 정말 슬픈 것은 보통 그 타이밍을 놓칠 때 발생한다.
나는 마들렌을 먹은 타이밍이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가족은 예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이제는 행복과 함께 힘듦과 아픔을 나눈다.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는다. 이제는 가을이 몰고 오는 스산한 바람이 그저 시원하고 기분 좋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