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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은 May 29. 2021

54:週, 부터

整理

: 정리


삿포로에서의 워킹홀리데이는 18년 3월부터 19년 3월까지였다.

워킹홀리데이 동안 있었던 일을, 본래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처럼 글을 쓰겠다는 게 계획이었다.

무리 없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

계속 미뤄지고, 언제부턴가 그때그때의 기록을 남긴다기보다 몇 주 전 기억을 더듬어 쓰고, 언젠가부터 1년 전 추억을 쓰고, 또 시간이 지나다 보니, 2년 전 일을 회상하며 적게 되었다.  

그래도 시점은 그때 그 감정을 떠올려 보면서, 당시 그 일을 겪고 있는 나인 것처럼 적었다.

정말 소중한 1년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쓰겠다는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기록이 잘 마무리돼서 뿌듯하다.

이제부터 몇 년 뒤, 5년, 10년 뒤, 잊어버릴 수도 있는 추억들을 잘 정리해 둔 것 같다.




内定

: 내정


19년 3월 이후부터, 난 다시 일본에 돌아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학점은행제로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했다.

온라인 강의로 학점을 땄는데, 컴퓨터공학은 전혀 모르던 분야라 정말 울고 싶은 심정으로 공부했다.

다행히 온라인 강의가 빡세지 않아서, 나중에는 이해 안 되더라도 학점만 따자는 생각으로 꾹 참고 학사 자격을 얻어냈다.

물론 단순히 학점은행제 수업만 듣는 거로는 졸업 학점을 1년 안에 채울 수 없었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따야 했는데, 이건 결코 쉽지 않았다.

19년도 정보처리기사 시험 난이도 무척 낮은 편이었어서 무리 없이 합격했지만, 난이도가 높았다면 장담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정보처리기사를 따지 못했다면 취업 도전도 반년 정도는 늦춰졌을 것이다.

아무튼 대학교 졸업 자격을 무사히 1년 안에 얻어냈다.

그리고 이 와중에 JLPT 1급도 땄다.

이것 역시 쉽지 않았다.

합격 커트라인 점수보다 겨우 4점 더 받아서 합격했다.

게다가 넘어야 할 산은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이런 모든 과정을 겪는 중에 일본 수출 규제 문제가 터졌다.

한국에서는 일본 불매운동으로 대항했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또 그에 대한 대항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평소보다 몇 배 늦추기 시작했다.

보통 한 달이면 발급되던 비자가 3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 늦춰져 발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불매 운동과 동시에 일본의 한국인들에게 의지하던 관광업들이 무너지면서, 서비스업에 대한 취업이 어려워지게 됐다.

그로 인해, 일본 취업을 노리던 사람들이 IT기업 취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고, 더불어 IT기업의 채용 인재에 대한 눈높이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일본어로 자기소개 정도만 할 줄 알아도 채용해갔던 회사들이, JLPT 1급을 원하고, 보다 회화가 잘 되는 사람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수출규제에 대한 비자 발급 문제가 조금씩 풀려갔으나, 그 뒤로 코로나19가 터졌다.

난 그때 IT 교육기관에 다니고 있었다.

3개월짜리 수업으로, 일본 취업까지 지원해 주는 학교였다.

이 수업만 잘 마치면 일본 취업을 무사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해 얼어붙은 양국 관계가 아직 제대로 풀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까지 터져서 정말 용을 써도 못 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도 해봤다.

진짜 도저히, 도저히, 도저히 안 될 때까지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난생처음 이력서 사진도 찍어가면서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난 또 신입이라기엔 너무 늦어버린 만 31살이라는 벽도 넘어서야 했다.

같이 면접 봤던 IT교육기관의 나이 어린 동기들이 합격해서 내정받는 동안, 난 다 떨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회사가 다른 회사들보다 규모도 크고,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좋은 회사였는데, 그보다 안 좋은 회사도 떨어진 마당에 큰 기대를 걸어볼 수 없었다.

그래도 해야지 뭐, 라는 생각으로 면접도 전보다 세세한 부분까지 열심히 준비했다.

면접도 하면 할수록 늘은다고 하니까, 그 믿음으로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임원 면접에서 아주 쉬운 IT 용어를 너무나 틀리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것 외에도 설명도 못한 질문들이 많았다.

면접이 끝나고, 아, 또 떨어졌겠구나, 낙담하고 통보를 기다렸다.

그래도 뭐라도 해본다는 생각으로 통보가 오기 전에, 면접 때 대답 못했던 질문들에 대한 추가 답변 자료를 만들어 놓았다.

그 자료를 당장 보내진 않고, 합격해서 다음 면접으로 넘어가면 보내려고 만들어만 놓았다.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자료를 꾸역꾸역 만들고 있는 내가 서러워서 울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다행이게도 그 엉터리로 한 면접에서 합격하게 됐다.

바로 준비한 추가 답변 자료를 보내고, 며칠 뒤 회장님과 면접한 후, 무리 없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運命

: 운명


그런데 나만 일본 취업하는 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한국에 여자친구를 두고 갈 수 없었다.

내가 일본 IT 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여자친구는 일본 서비스업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일본 수출 규제 문제가 터지고 만 것이다.

서비스업에서 아예 채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자친구도 그제야 부랴부랴 IT기업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IT교육기관에 등록해, 6개월짜리 수업을 들었다.

나는 그동안, 회사 내정은 받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일본에 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정받고 4개월 뒤쯤, 취업 비자를 발급받았지만, 일본에 입국 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진짜 어떤 것도 장담할  없는 하루하루였다.

언제 입국 제한이 해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자친구도 전공도 아닌 IT기업에 단지 IT교육기관 수업을 들었다는 것만으로 취업할 수 있을지.

집에서 입국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백수 중 상백수처럼 살았다.

집에서 차려주는 밥 먹고, 냉장고에 항상 마련되어 있는 소주를 꺼내 마시고, 살만 뒤룩뒤룩 찌워 갔다.

물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컴활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그걸로 널널한 시간들이 채워지진 않았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나보다도 더 열악했다.

IT교육기관과 연계된 회사들이 채용을 연기한다는 소식만 전해와서, 스스로 월드잡에서 채용공고를 뒤지면서 지원할 수 밖에서 없었다.

이력서 단계에서 떨어진 경우도 많고, 겨우 면접을 잡았지만 줄줄이 다 불합격했다.

인격모독적인 말만 듣고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때 여자친구 눈물이 뚝뚝 흐르는데, 정말 안쓰러워서 속이 타들어갔다.

그러다 여자친구가 이 회사만은 합격하고 싶다고 했던 면접까지 떨어지자, 갑자기 각성을 했는지, 면접 예상 질문을 평소보다 열심히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나도 매일 모의면접을 봐주면서 부단히 애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만족스러운 회사는 아니었지만 여자친구도 드디어 합격은 하게 됐다.

만족스러운 회사가 아니었기에, 마냥 기쁘지만은 않으면서, 참, 이게 이루어지는구나, 어리벙벙했다.

정말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됐던 일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코로나19에 잘 대처해준 한국 덕분에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는 입국 제한을 해제하겠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뉴스가 나오기 한 달 뒤쯤, 회사에서도 입국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가 내정받고 7개월쯤 지나서 인 것 같다.

드디어 일본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또 절묘하게도, 내 입국 날과 여자 친구 입국 날이 불과 3일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라 할 수 있는 성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2020년 11월부터,

다시 일본에서, 또는

이번엔 삿포로와는 다른 도쿄에서,

생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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