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재고실사는 처음이지? - 1 -
회계사들은 1년 중 언제 제일 바쁠까? 재무제표가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작성되다 보니 보통 연말 연초가 제일 바쁠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회계감사가 시작되는 연초부터 점진적으로 조금씩 바빠지다가 2월 중순부터 3월 초중순에 피크를 찍는다. 오히려 연말 연초엔 주로 재고실사를 다니기에, 회계감사 시즌과 비교하면 훨씬 여유가 있는 편이다.
내 생일은 빨라도 너무 빠른 1월 3일이다. 나는 1년 중 크리스마스부터 내 생일까지의 일주일을 가장 좋아하고 또 기다린다. 반짝이는 연말 분위기, 새해 인사와 함께 듬뿍이 건네지는 생일 축하와 사랑을 좋아한다. 타고난 관종에 시끌벅적한 술자리를 즐기는지라 늘 연말 연초가 되면 각종 모임과 생일 파티로 캘린더를 꼼꼼하게 채워나갔다.
연말이니까, 생일이니까! 회사에도 더 예쁘게 입고 가고 싶어 특별히 신경 써서 원피스도 몇 벌 주문했다. 그땐 상상도 못 했지. 내가 평소엔 신지도 입지도 않는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연말 연초 내내 온갖 창고와 공장들을 누비게 될 줄은 말이다.
인생의 9할은 운이라던가. 서울에서 비교적 간단한 종류의 재고실사나 금융실사를 맡게 되면, 오전에 모든 실사가 끝나 조기퇴근을 하기도 하지만, 저어 쪽 남부지방 어디 끄트머리에서, 혹독한 추위에, 그것도 실외에서 재고실사를 하게 되는 경우엔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게다가 비행기 결항이라던가 날씨로 인한 변수가 생긴다면? 예쁜 원피스를 입고 저녁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가녀린(?) 여자라고 해서, 연말 파티가 밀려있다고 해서, 생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재고자산은 회사가 판매하고자 창고에 쌓아둔 제품들이고, 재고실사는 회사의 창고를 열어 재고자산을 직접 세어보고 확인하는 일이다. 예컨대 삼성전자 재무제표에 '갤럭시 s22 핸드폰 150만 원짜리 1,000개와 부품 10만 원짜리 500개, 에어드레서 100만 원짜리 300개가 창고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고 하자. 정말 그 개수가 맞는지, 파손되거나 부패되어 가치가 없어진 재고는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 재고실사다.
위의 예는 아주 단순화시킨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종류의 다양성과 양의 방대함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샘플링을 통해 일부를 직접 세어본 후 전체가 맞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 실사가 진행된다.
내가 갔던 수많은 재고실사 중 여*NCC라는 회사의 여수공장 실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재고실사일은 마침 그 해의 마지막 금요일이었고, 원래 계획은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 실사를 빠르게 마친 후 오후 3시 비행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저녁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꽤 있어 야심 차게 친구들과 내 생일파티를 겸한 연말 모임을 계획해두었다.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가 않는 것인지. 전 날 눈 예보를 보고 설마설마했는데, 그날 아침 남부지방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고, 여수행 비행기는 결국 결항이 되고 말았다. 부랴부랴 여수행 KTX 편을 알아보았으나 8시 20분 차는 이미 만석이었고, 그다음 차는 무려 11시 30분 출발이었다.
연말 연초의 재고실사 일정은 아주 촘촘하게 짜여지는 데다 각 회사 담당자들과 스케줄을 맞춰 계획한 것이기에 날짜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물론 공장에서도 실사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뒀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함께 실사를 하러 가는 여*NCC 본사분들과 상의하여 11시 30분에 출발하는 KTX를 예매했다. 그나마 자리가 있어 5시간이나 걸리는 새마을호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생 끝에 겨우 공장에 도착하자, 내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이 소복이 쌓인 석유화학 탱크. 그 안에 들어있는 석유화합물들이 내가 오늘 확인해야 할 재고자산이었다. 핸드폰이나 자동차는 직접 개수를 셀 수 있지만, 액체는 어떻게 재고를 파악해야 할까? 저장탱크 위로 올라가 안에 들어있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눈금을 읽고 확인해야 한다.
ㅇ.. 여.. 여기를 올라가라고요..?
말이 쉽지, 높이가 20m쯤 되는 저장탱크를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에 의지하여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데, 나는 원체 겁이 많아 청룡열차는커녕 바이킹도 타지 못하고, (태어나서 딱 1번 타고 엉엉 울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까지 가지고 있어 탱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해 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전에 내린 폭설로 군데군데 눈이 얼어 더욱 미끄럽고 위험해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것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을. 내 앞 뒤로 회사 담당자분들을 세우고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디뎠다. 어그부츠를 신은 발이 덜덜 떨렸다. 운동화를 신고 왔으면 더 나았으려나? 밑이 뚫린 계단이다 보니 아래를 내려다보면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서 최대한 앞사람 뒤꽁무니만 보며 올랐다.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 핫한 연말에 내가 석유화학탱크를 오르고 있을 줄이야... 누가 회계사가 되면 책상 앞에서 계산기만 잘 두드리면 된다고 했던가...!
탱크 정상(?)에 오르니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퍽 근사해 보였다. 이런 색다른 경험도 결국 특권이고 추억이다 싶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남겼다. 눈금도 다행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다시 내려갈 일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원래 등산도 하산할 때가 더 위험한 법 아닌가. 게다가 내려갈 땐 뚫린 계단 아래를 보지 않을라야 안 볼 수가 없으니 무서움은 배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오늘 확인해야 할 탱크의 개수가 7개라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탱크는 첫 번째 탱크보다 조금 더 빨리 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올라서는 오늘 내에 실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회사 분들은 이런 내가 얼마나 답답하시겠나. 결국 남은 5개의 탱크는 다른 회사 분들이 올라가 눈금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오시고, 그것을 내가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실사를 대체하였다.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묘수였다.
우여곡절 끝에 실사는 별 탈 없이 끝났다. 조금 더 용감한 회계사가 왔더라면 회사 분들도 훨씬 편했을 텐데 죄송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회계사 시험에는 나 같은 겁쟁이를 변별할 수 있는 과목이 없는 것을.
니트 위에 남방, 그 위에 플리스, 그리고 또 그 위에 패딩을 입었는데도 무진장 추웠다. 눈 풀린 사진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나와는 달리 엄청 성큼성큼 씩씩하게 잘 오르시던 본사 여직원 분. 매우 멋지셨음!
다행히 오후에는 공항 정비가 끝나 비행기가 뜬다는 즐거운 소식이 전해졌고, 비행기 시간이 조금 남아 다 같이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하루 종일 눈치 보고 긴장하고, 추위에 달달 떨며 계속 석유 탱크를 오르락내리락거리고 공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보니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소주 한잔에 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만취하면 비행기 안태워줄까 봐 딱 3잔만 마셨던 것 같은데, 참 꿀맛이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날 저녁 생일파티는 어떻게 됐냐고?... 그건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 글을 쓴 후 회사의 근황이 궁금해져 네이버에 검색을 했는데, 얼마 전 무려 8명의 사상자(4명 사망)를 발생시킨 폭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겐 힘들었지만 특별한 추억으로 남은 실사 장소인데, 그토록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니,,, 너무 많이 놀랐고, 이 글을 발행해도 되는지 망설여졌습니다.
저는 어쩌다 한번 간 실사에도 무섭다며 이렇게 호들갑이었는데요. 매일 이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하시는 많은 현장 노동자 분들께 경의를 표하며, 이 같은 안타까운 사고가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와 대책 마련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