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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Jan 23. 2022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긴장 가득했던 첫 필드의 기억(feat. 아무튼 출근)


mbc에서 하는 <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을 꽤 즐겨봤었다. 생소한 직업이건, 다소 평범한 직업이건 나는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일상,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의 하루를 훔쳐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이렇게 재밌는 프로에 '회계사'는 한번 안 나오나? 하고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지난가을 드디어! 삼일회계법인에 다니는 3년 차 회계사 한 분이 이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동기들이나 지인들로부터 종종 회계법인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회계법인 사무실에 놀러 가 본지도 오래였다. 더군다나 현업에 있을 때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다른 회계법인의 사무실을 구석구석 볼 수 있다니! 화면 속에 등장하는 낯선 사무실의 모습도, 회계사들의 일하는 모습도,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프로그램에선 재미를 위해 김동욱 회계사님을 '병아리 회계사'라 칭하며 어리바리한 모습을 재차 강조해 보여주었지만, 회계법인 구조상 시즌을 2번이나 겪은 3년 차 회계사는 사실 초짜가 아니다. 3년 차면 규모가 작은 회사의 인차지(In-charge, 팀장)를 맡기도 하고, 꽤 핵심적인 계정들의 감사도 많이 담당하게 된다. 병아리라기보단 오히려 법인에서 가장 중요한 허리 역할을 하는 연차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나의 '진짜' 병아리 시절이 떠올랐다. 시험만 합격하면 자동으로 프로페셔널함이 짠! 하고 장착될 줄 알았지만, 첫 필드에 나간 내 모습은 갓 부화한 새끼 병아리처럼 처량했다. 먹이를 물어다 줄 어미새를 기다리는 새끼처럼 두리번거리며 인차지 선생님과 선임 회계사님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에겐 첫 직장이자 유일한 직장이 회계법인인지라 다른 회사를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TV를 보면 일명 '사수'라 불리는 분들이 1대 1 마크해서 친절하게 업무를 알려주던데... 여기선 누구도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다들 어찌나 바빠 보이시는지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차지(팀장) 선생님으로부터 '어싸인(assign, 업무 분배)' 메일이 날아들었다. '어싸인'은 말 그대로 각자 어떤 계정을 맡을 것인지 업무를 분배하는 것이다. 감사란 '회사가 재무제표를 올바르게 작성했는지 검토하여 의견을 주는 일'이고, 회계사들은 감사기간 동안 각자 맡은 계정문제가 없는지, 회사가 제시한 금액이 정확한 금액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회계사 시험 과목 중 가장 중요한 '회계학'은 재무제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배우는 과목, '회계감사'는 회사가 작성한 재무제표가 잘 작성되었는지 검토하는 실무적인 방법을 배우는 과목이다.
대략 이런 식으로 어싸인이 이루어진다.

몇 가지 계정에 내 이름이 떡하니 적힌 엑셀 파일을 보고 있자니 긴장도 되고 알량한 책임감도 생겼다. 인차지는 재무제표를 쭉 훑어본 후 회사 특성과 각 계정 별 이슈사항에 따라 업무를 분배하는데, 보통 막내들에겐 가장 검토가 쉬운 현금과 유형자산(토지, 건물 등)류의 계정 배정한. 이슈사항이 있는 계정이나, 매출채권과 재고자산 등 회사의 핵심 계정들은 높은 연차의 회계사가 맡아 보다 까다롭고 꼼꼼하게 검토를 진행한다.


이렇게 연차 별로 업무가 분배되면, 각 계정 별로 그에 맞는 감사 절차를 진행하면 된다. 근데... 그러면 되는데, 분명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내용인데, 첫 필드에 앉아있는 내 머릿속은 새카맣기만 했다. 기준일자의 잔액증명서만 확인하면 되는 예금 계정을 검토하는데도 그렇게 긴장이 되고, 이게 정말 맞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끝없이 자기 검열을 했다. 뻔한 내용을 물으면 허접한 초짜처럼 보이겠지 싶어 질문 하나를 하는데도 수십 번 고민을 했다.


지금은 10년이 꼬박 넘어버린 기억인데도 첫 필드에서 첫날 느꼈던 그 어색함과 긴장감, 약간의 설렘까지 모든 감정이 살아있는 듯하다. 내가 회의실 어느 자리에 앉았었는지, 인차지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심지어는 클라이언트 사 회계팀의 담당 부장님과 여자 대리님, 남자 사원 두 분의 이름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 첫 기억은 이렇게나 생생할 만큼 소중하다.

내 첫 감사 업체는 <LIG투자증권>이라는 증권사였다. 2017년도에 케이프인베스트먼트에 인수되어 케이프투자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런 반면에 막상 일주일 간 무슨 업무를 했는지, 무슨 정신으로 보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을 제대로 하긴 했으려나...? 더듬더듬 지난 분기에 다른 회계사님이 작성해둔 전기 조서를 살펴보며, 회계사 인척 앉아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허리를 더 꼿꼿이 세웠지만, 다른 분들에겐 내가 그저 삐약거리는 병아리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날 마음만큼은 나는 우주 최고 전문가였다는 것. 많이 어설펐을지라도 그때만큼 재무제표의 모든 계정을 꼼꼼히 훑어보고, 회사 분들의 작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일을 했던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잊을 수 없는 첫 필드의 기억. 누구에게나 있을법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그날의 기억이 슬럼프가 올 때마다 내게 자극제가 되어주곤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단 한 번뿐이기에 소중한 처음의 기억. 누구에게나 그런 처음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처음은 어땠었나요?

입학 첫날이나 첫 출근 날, 혹은 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그날만큼 설레고 진심이었던 때는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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