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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Dec 31. 2022

하루에 노래방 2번 가본 사람?

회식, 어디까지 해봤니? - 2 -



우리 본부 최고의 주당 선생님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던 나의 첫 회식.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주류회사나 저축은행, 건설사처럼 회식이 잦고 술꾼들이 많이 모여있는 업무에 차례로 어싸인(업무 배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인차지 선생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시절 내내 억압되어 있었던 나의 잠재력을 가감 없이 끌어내어, 내가 얼마나 패기 넘치는 인재인지 보여주었다.


손상된 적 없는 싱싱한 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 파릇파릇한 이십 대 초반의 객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야리야리한 외모가 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냥 술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단 한 번의 술자리도 거절한 적이 없었고,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 결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도 없었다.


보통 5일의 감사기간 중 3일 정도 회식이 잡혔다. 정말 심한 경우에는 5일 내내 회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월요일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warm-up 하자며 오프닝 회식이 열렸고, 금요일은 그냥 헤어질 수 없다는 핑계로 클로징 회식이 잡히는 것이 기본값이었다. 화요일엔 어제 못다 한 이야기들이 아쉬워서, 목요일은 원래 회식하는 날이니까 임원진분들도 모시고. 모든 회식엔 나름의 그럴듯한 이유가 긴 했다.


클라이언트 사 입장에서 감사기간은 분기 별 혹은 반기 별로 일주일 씩, 1년에 끽해야 2번에서 4번이다. 회사에 중요한 일을 하러 찾아온 손님들을 대충 대접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야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정말?). 하지만 우리는 매주 새로운 회사를 만나 매주 전투처럼 회식을 치러내야 한다 것이 문제다.


회식자리에서 클라이언트와 회계사들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전투를 치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은근한 경쟁구도가 형성된다. 클라이언트 사의 회계/재무팀 분들은 어떻게든 오늘 회계사들을 고주망태로 만들어버리고야 말겠다는 쓸데없는 소명의식을 가 경우가 많았고, 우리는 반드시 클라이언트를 이겨내리라는 더 쓸데없는 다짐을 하며 회식자리에 앉다. 제조업 뿐 아니라 은행이나 증권사 회식을 갈 때도 온도차이만 있을 뿐 이런 묘한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전투의 승자는 없다. 다음날 모두가 힘들어지지만, 더 힘들어하는 쪽을 보며 덜 힘든 쪽이 아무 소득 없는 우월감을 살짝 맛보는 정도?

회계/재무팀 분들 입장에선 아무래도 회계사들이 '감사'를 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수정사항이 나오면 본인들의 잘못을 지적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옛날(?) 분들은 회계사들이 꼼꼼하게 업무를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수작으로 술을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지. 그리고 그런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술자리에서의 이런 묘한 구도가 생긴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이 없었던 라떼(?)의 회식들은 '위생'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술잔을 돌리며 각종 병균을 공유했다. 한잔 두 잔 돌리며 주거니 받거니 인사를 나누다 보면 금세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겉옷만 자리에 걸쳐둔 채 집으로 도망가는 사람도 생기고, 취한 채 화장실에 쓰러져 자는 사람도 있고, 한쪽 구석에서 토를 하는 사람도 한 명씩 꼭 있기 마련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회식이 진행되던 테이블 위에 그대로 토를 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직접 목격했다.


하루에 노래방 2번 가본 사람?
네, 바로 접니다.


심지어 하루에 노래방을 2번이나 가는 경우도 종종 다. 1차에서 신나게 먹고 마신 후 2차로 노래방을 가는 것까진 ok. 거기서 헤어져야 아름다운 마무리가 가능한데, 술이 깼다면서 다시 3차를 가면 말 그대로 재앙의 시작이다. 3차에서 또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해대다가 4차로 노래방을 가고, 다시 또 술이 깼다며 포장마차로 이동하고... 하루에 한 번 가도 힘든 노래방을 하루에 2번 이라니... 아재들이 그렇게 노래를 잘하느냐? 그렇다면 내가 이런 말도 안 하지. 미스터트롯 참가자들도 하루에 2번 노래방은 안 가지 않을까?


점심시간엔 식사를 거르고 근처 내과를 찾아 낮잠을 자며 숙취해소 목적의 링거를 맞는 날도 많았다. 당연히 역류성 식도염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건강검진에서 지방간 진단을 받고 휴직을 한 회계사님도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며 걸핏하면 소개팅남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연락해서 뭐 하냐고 하면 술마신다지, 아니면 야근이라지, 제대로 된 연애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 악화와 삶의 질 저하는 내가 감사부서에서 구조조정본부로 트랜스퍼를 신청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 되었다. 만약 평생동안 분해할 수 있는 알코올 용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용량을 2년도 채 되지 못해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삐걱대는 몸을 고치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 졌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던 탓에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바람대로 트랜스퍼 후 새로운 팀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트랜스퍼를 하게 된 계기와 구조조정본부라는 새로운 부서를 선택하게 된 이유 등도 천천히 풀어볼 예정.


술을 못 마셔도 회계사 할 수 있을까요?


늘 강조하지만, 회계법인에서의 모든 일은 팀 by 팀, 사람 by 사람, 클라이언트 by 클라이언트다. 같은 본부에 있어도 일주일에 1-2번 이하로 회식을 하는 동기도 있었고,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했을 뿐 요령껏 빠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회식자리도 많았다. 주량이 소주 2-3잔이 채 되지 않아도 일만 잘하면 멀쩡히 승진 잘하고, 파트너도 될 수 있다. 실제로 아예 술을 못하시는 파트너분들도 꽤 여럿 봤다.


무엇보다 이 글에 나온 회식문화는 대부분 10년 전 내가 1-2년 차 시절 감사본부에서 겪었던 것들이다. 구조조정본부로 옮겨 후에는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 잘 나가는 외감대상 법인들과 달리 구조조정을 받는 위태로운 회사들에겐 회식을 할 여력이 없기에 보통 가벼운 식사 대접만 받았다. 대신 팀 사람들끼리 끈끈해서 우리끼리 하는 자체적인 회식이 일주일에 1-2번씩 있었다. 당시 우리 팀 실세였던 분들 다들 또 엄청난 애주가였던지거의 매일같이 야근 후 술을 드시 했다. 하지만 전부 비공식 회식이므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참여를 선택할 수 있었고, 내가 인차지 role을 맡으며 팀의 실세가 된 후에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회식을 일절 하지 않았다.


실제로 퇴사 전까지 거의 2-3년 동안은 회식 달에 한두 번 정도만 있었다. 출장을 가 간단하게 같이 저녁을 먹은 후 각자의 자율과 선택에 맡겼고, 상무님의 집합 명령(?) 아래 가끔 모이는 게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회식은 선약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회사에선 이상하게 술맛이 전혀 나지 않아 사석에서만 술을 마시게 됐다. 반면 법인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졌고, 업무효율성도 크게 향상돼 야근의 양이 현하게 줄었다. 퇴사 전 2-3년 간 나의 회계사 생활 만족도는 감히 4대 회계법인에서 상위 1% 안에 들었을 거라 확신한다.


이처럼 회계법인의 생활은 너무도 다양하다. 술을 좋아한다면 매일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쉽게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술을 싫어한다면 (어느 정도 연차가 찬 후에는) 본인이 원하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더욱이 회식과 술자리를 강요하는 시대도 아니고, 술 대신 다른 수단으로 클라이언트와 소통하고 본인의 강점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술을 잘 마신다면 법인에서 예쁨 받는 것도, 법인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훨씬 쉽다. 술과 골프가 주를 이루는 영업환경에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영업실적을 높이는 데 있어 훨씬 수월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코로나를 겪으며 이제는 완연한 30대 중반이 되기도 했고, 집합금지와 이른 통금에 몸이 적응하면서 나새벽녘까지 노는 것이 많이 어색해졌다. 20대 땐, 아니 코로나 이전 신혼 때만 하더라도 남편과 함께 새벽 늦게까지 3차 4차를 달리기도 했는데, 이젠 11시만 넘어가도 체력이 부친다. 게다가 법인을 나온 후로는 누군가와 팀으로 일할 일이 없어 '회식'이라는 문화 자체와 아예 멀어졌다 보니 아주 가-끔은 그 시절의 회식 바이브(?)가 살짝 그립기도 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죠. 제가 입사했던 때로부터 지난 11년 동안 회계법인의 문화 역시 너무나 많이 변했습니다. 게다가 2년 여 간의 코로나를 겪으며 회식문화는 전에 없이 많은 변화를 겪은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지금은 이사님이 되 친한 선생님께 요즘 회계법인의 회식 문화에 대해 여쭈어봤습니다. 정말 문화가 많이 바뀌었고, 라떼(?)에 비하면 회식의 빈도 수가 확연히 줄었더라고요.


잊고 있었는데...  클라이언트 분들과 워크숍도 가고 그랬습니다. 저도 펜션 하나 잡아서 클라이언트 분들이랑 밤새도록 술마셨 기억이 나네요.. 대체 왜 그랬지....?ㅋㅋㅋ

그나저나 이사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는데... 입에 붙은 '쌤'이 절대 안 떨어져요^.ㅜ 제가 요즘 회계법인 상황을 잘 몰라서 가끔 여쭤보곤 하는데, 항상 친절히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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