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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Jun 11. 2023

인차지(In-charge)가 왕이다.

사심 어싸인과 어싸인 간택, 회계법인의 스캔들에 관하여


회계법인에서 '인차지(In-charge)'는 핵심 중의 핵심, 꽃 중의 꽃이다. 보통 3-4년 차가 되면 본격적으로 몇몇 프로젝트의 인차지업무를 맡게 되는데, 비로소 한 회사를 팁장급으로 담당하여 맡아볼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의미다. 물론 인차지 위에 잡매니저도 있고, 담당 파트너도 있지만 인차지는 실무책임자로서 담당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연차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점점 더 많은 / 점점 더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의 인차지를 맡게 되는 것은 다양한 이치이고, 결국 회계법인에서 살아남으려면 인차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인차지에게는 본인이 일하고 싶은 팀원들과 팀을 꾸릴 수 있는 '어싸인' 권한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어싸인'이라는 제도 하에 회계법인의 갖가지 조직문화가 피어난다.


일 잘하고 싹수없는 스태프 vs 일은 못하지만 성실하고 착한 스태프
당신의 선택은?


온라인에서 늘 화제가 되는 밸런스게임 주제 중 하나다. 당신이 인차지라면, 어떤 스태프를 어싸인하겠는가? 뻔한 대답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 잘하는 스태프를 싫어하는 인차지는 없지만, 결국 조직생활의 스트레스 8할은 사람이기에, 인차지도 자신과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한다. 당연히 성격 좋고 일 잘하는 스태프는 어느 프로젝트에서나 인기 만발이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스케줄표가 늘 꽉 차있다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뿌듯할 것이고, 다들 바쁜 와중에 혼자만 팽팽 놀고 있다면 몸은 편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인차지가 선호하는 스태프가 있는 것처럼, 스태프들에게도 같이 일하고 싶은 인차지가 있다. 일 잘하고 똑똑하고, 나이스한 태도까지 갖춘 인차지를 누가 싫어하랴. 반면 멍청하고 야근 많이 하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인차지는 스태프들도 기피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스태프는 인차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문제. 물론 1년에 한 번씩 함께 일하는 인차지와 스태프를 서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있고 이러한 평가가 성과급 산정의 기초가 되기도 하지만, 스태프들은 아무리 익명이라 할지라도 솔직한 평가를 하기가 쉽지는 않다.

슬프지만 대부분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회계법인에서도 스태프들의 고혈을 빨아먹기로 악명 높은 인차지가 임원들에게는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A: B회계사, 다다음주에 뭐 해?
B: 아직 아무것도 잡힌 것 없습니다.
A: 그래? 그럼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어싸인 전에는 대략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며 다음 어싸인에 대해 귀띔을 받기도 하고, 아무런 사전 언질 없이 어싸인 확정 메일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늘 강조하지만 회계법인의 모든 일은 팀 by팀, 사람 by사람이다.) 어싸인 풀이 한정되어 있고, 바쁜 시즌일수록 늘 사람이 부족한 회계법인 특성상 본인이 원하는 사람을 언제나 마음껏 어싸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몇 번의 어싸인이 반복되고 나면 어느 정도 공고해지는 관계가 생긴다. A라는 인차지가 B라는 스태프가 마음에 들어 반복적으로 어싸인을 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B가 A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워낙 다양하고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인차지도 말 한마디 안 해 본 스태프를 어싸인해야만 하는 상황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한두 해가 지나다 보면 인차지에게는 선호하는(자주 어싸인하는) 스태프가 최소한 너덧명은 생기게 되고, 스태프도 주로 모시는(?) 인차지가 보통 1-2명에서 2-3명 정도 생긴다. 그리고 남성 비율이 높은 회계법인특성상 자주 일을 함께 하다 보면, 호형호제하며 돈독한 우정을 쌓고 점점 더 공고한 관계를 만드는 경우 많다.


회계법인의 봄은 3월이 아닌 9월이다.


재밌는 건 회계법인도 결국 다 그렇고 그런,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조직이므로, '사심어싸인'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심어싸인이 가장 횡행하는 때는 바로 뉴스탭이 새로 입사하는 시기이다.


감사부서는 매년 9월에(일부는 학기를 마친 후 1월에) 따끈따끈한 New staff들이 입사하고, 각 본부 전 직원들에게 신규 입사자들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배부된다. 사진을 보며 누가 이쁘네 잘생겼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유치하지만 외모 순위를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꼭 예쁜 / 혹은 잘생긴 스태프를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어싸인을 하는 능구렁이 같은 인차지들이 있다. 대학교에서도 순수하고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을 노리는 복학생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어리숙하고 예쁜 뉴스태프를 어떻게한번 꼬셔보려는 그런 인차지들 말이다. 사실 어느 회사, 어느 조직에나 존재하는 문제겠지만, 회계법인의 인차지들에겐 '어싸인' 권한이 있기에 좀 더 수월하게 찝쩍(?) 거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뉴스태프들이 입사하는 무렵은 사내 연애가 가장 많이 꽃 피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학교에서도 신입생 입학 시기에 가장 많은 CC가 생기고 사라지듯이 말이다. 실제로 내가 감사부서에 있을 때 동기가 30명가량 되었었는데, 공식적으로 알려진 커플이 네 커플이었고, 두 커플은 실제 결혼에 골인했다. 동기뿐 아니라 상사와 썸을 타는 경우도 많고, 비공식적으로 소리소문 없이 사귀다 헤어지는 경우도 많다. 회계사들은 다른 부서와 협업을 하는 경우도 많고, 지방출장도 워낙 많기 때문에 회계법인에는 늘 썸과 연애, 심지어는 불륜까지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다.


문제는 어디에나 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태프는 원하지 않는데, 인차지가 사심을 가지고 계속 어싸인을 한다면 무척이나 해진다. 실제로 우리 부서의 모 인차지가 한 여자 스태프에게 흑심을 품고 반복하여 어싸인을 했는데, 여러 번 고백에도 스태프가 거절하자 기존에 미리 해두었던 시즌 어싸인을 한 번에 모두 취소한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스태프는 갑자기 스케줄이 엉망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억울한 소문에 휩싸일 수 있다. 스태프는 어싸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진상에게 잘못 걸리면 불편한 동행을 계속 함께해야 한다. 특히 하루 온종일 얼굴을 봐야 하는 출장의 경우, 흑심 품은 인차지와 가게 되면 고난길 그 자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가 흔한 경우는 절-대 아니다. 어느 조직에나 그렇듯 드물게 진상이 존재하는 것뿐.


어싸인 간청으로 인차지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스태프는 인차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일하고 싶은 인차지에게 본인을 어싸인해 달라고 어필하면 된다. 물론 아무리 간절하게 어필을 하더라도 여러 가지 여건 상(기존 스케줄의 조정, 기존에 어싸인 중인 스태프가 이미 많아서 등) 어싸인이 당장은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라도 해두면 기회는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실 이러한 어싸인 간청은 술자리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럴 땐 또 술 잘 마시고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이 확실히 유리하다.


나는 구조조정 부서에 있을 때 실제로 어싸인 간청을 꽤 많이 받았었다. 내가 주로 하는 '회생' 업무는 본부 내에서 소위 잘 나가는(돈을 잘 벌어오는 = 부서 매출에 기여도가 높은) 업무는 전혀 아니었으나, 출장이 몇 달씩 이어지는 워크아웃이나 숨 막히는 야근을 견뎌야 하는 NPL에 비해 워라밸이 매우 좋고 출장이 적은 편이었기에 인기가 꽤 많았다. 회식자리나 사석에서 같이 꼭 일해보고 싶다는 은근한 플러팅(?)을 받기도 하고, 흡사 연애편지와 같이 길고 긴 메일을 종종 받기도 했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몇 달째 출장이 이어져 아내에게 이혼하자는 얘기를 들었다며, 가정을 지키고 싶으니 어싸인을 좀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이 담긴 메일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회생업무 특성상 소규모로 팀이 구성되고 기존에 같이 일하던 분들도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었기에 그분을 당장 어싸인할 수 없어 괜스레 죄송해했던 기억이 있다.

구조조정부서와 회생업무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의 편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썰을 풀어볼 예정이다.



어싸인이라는 권한은 인차지에게 강력한 무기이자 특혜다. 원하는 사람과 팀을 꾸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장점인지는 조직생활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분명 공감할 것이다. 스태프들도 본인이 원하는 팀을 꾸릴 수는 없지만, 어싸인이라는 제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그러한 장점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는 각자의 몫. 회계법인은 개개인의 역량이 정말 중요한 이다.




정말 오랜만에 부랴부랴 글을 써보았습니다. 다소 오래된 기억에 의존하여 추억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쓰고 있는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재미가, 누군가에게는 필요했던 도움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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