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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Apr 29. 2024

그런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서평


마라토너와 소설가. 뭐랄까 내게는 맞지 않는 짝처럼 보이는 단어 조합이다. 미디어의 영향인지 그냥 나만의 괴이한 편견일지 모르겠으나, '소설가'라고 하면 왠지 음침한 구석이 있을 것만 같고, 볕이 들지 않는 골방에서 하루종이 처박혀 담배를 뻑뻑 피우며 글을 쓰는 모습이 상상된다. 반면 '마라톤'이라고 하면 윤기 나는 건강한 몸매, 매끈한 근육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햇빛에 반짝이는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하루키의 글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장거리를 달리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이 어쩐지 굉장히 닮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작년에 출판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하루키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그가 70 중반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 저리도 긴 - 심지어 엄청난 상상력과 짜임이 필요한 - 장편소설을 엮어내다니. 재능뿐 아니라 체력과 열정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일진대, 이 책에 그 답이 있었다. 지금의 하루키는 그가 여태껏 30년 넘게 정성스레 빚어낸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달리기에 관한 글이 아니다. '달리기'를 소재로 하루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하루키의 삶을 풀어낸 에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달리기와 글을, 매일의 하루를, 아니 그의 '인생'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를 역력하게 볼 수 있는 글이다.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공감되는 문구가 정말 많았지만, 가장 뼈 아팠던 문장을 하나만 뽑으라면 바로 윗문장이다. 아이를 출산하고 요즘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선순위'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매일 아침 5시 전에 일어나 글을 쓰고, 해가 지면 가능한 한 빨리 잠에 든다고 한다. 규칙적인 패턴을 몸에 익혀 생활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집필에 몰두하기 위하여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나 나이트라이프도 거의 포기하였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각은 새벽 4시 30분. 아침 5시 전에 일어나기는커녕 5시 전에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닝라이프보다는 나이트라이프를 압도적으로 사랑하고, '규칙적'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서 살아가고 있다. 뭐 그렇게 살아도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정신없이 바빴던 내 삶에 아이라는 존재가 더해지니 하루키 말마따나 요즘 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아이의 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골든 타임을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아닐지, 아이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은 어쩌면 찰나에 불과할진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이가 있어도 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마치 힙하고 멋진 것처럼 여기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다. 하루키의 책무이자 최우선순위가 좋은 글을 낳고 키워내는 것이었다면, 지금 내가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책임져야 할 일은 내가 낳은 아이를 바르게 키워내는 것일 텐데. 다시금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어떤 사람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을 어떤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손쉽게 얻는다.  ...(중략)... 무엇이 공평한가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두 번째로 공감되고 뼈 아팠던 문장은 이것. 어느덧 3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 모든 인생은 결국 + / - 가 모여 0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남들에 비해 타고난 게 많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참 거만했다. 큰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운동을 하지 않았고,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아도 좋은 피부를 가졌기에 매일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잠에 들며, 선크림조차 제대로 발라본 적이 없었다. 늘 남들보다 적게 공부해도 더 좋은 성적을 얻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드니 점점 부족한 관리와 노력이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나쁜 식습관과 운동 부족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지방률을 선물했고, 피부는 힘을 잃어갔다. 어릴 적부터 좋은 습관을 쌓고 관리를 잘한 친구들은 확실히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서 윤이 난다. 남들보다 적게 공부하고 덜 노력한 탓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에 인이 박였다. 하루키는 시종일관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은 대단한 마라토너도, 셰익스피어와 같은 거장도 아니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악마의 재능을 가진 천재 소설가다. 그런 와중에도 체력과 건강 관리를 위해 매일 꾸준히 달리는 사람.


이곳에서 약 10분 정도 휴식을 취했지만, 그 사이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일단 앉아버리면 다시 일어서서 달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나는 하루키와 달리 타고난 성격도 부지런하지 못하고 게으른데, 전술한 이유로 학창 시절 좋은 습관까지 습득하지 못했다. 하물며 지구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뭐든 한번 놓치면 영원히 놓치게 된다. 지금껏 즐겼던 많은 취미만 보더라도 - 예컨대 발레, 승마, 방송댄스 등등 - 몇 개월 간 열과 성을 다해 배우다가도 단숨에 손을 놓쳐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공부든 취미든 무언가를 해내고자 마음먹으면 되도록 단 하나의 핑계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너무 쉬워서, 한 번 샛길로 빠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 내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살려고' 시작했던 필라테스는 16주부터 출산 바로 직전까지 주 2회 수업을 단 한 주도 빼먹지 않았다(태교여행에 갔던 주만 제외). 지금 쓰고 있는 서평도 마찬가지다. 딱 1번만 안 쓰게 되어도 그다음에는 또 다른 핑계를 찾기가 너무 쉬울 것 같아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이를 악물고 써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았기에, 혹은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유지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가 '아무리 힘들어도 마라톤 중에는 걷지 않는다'는 규칙을 - 아무도 강요하지 않음에도 - 스스로 세운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예외 없이 해나가려고 한다. 나처럼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그런 것이라도 있어야 목표한 바를 성실하게 이어나갈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 그런 여러 가지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 지금 여기에 있다.


누군가 내게 너는 '요행수'가 좋은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 후 실수로(?) 회계법인 입사 지원 시기를 놓쳤으나 중문과 교수님이 먼저 내게 입사를 했는지 물으며 친한 본부장님이 있으니 연락해 보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딜로이트에 꼼수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단 한 번도 강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창업을 한 지인에게 먼저 연락이 와 제안을 받고 얼떨결에 경제학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대부분 우연찮게, 별다른 노력 없이,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시작하게 된 일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한 횡재가 아니다. 교수님의 수업을 열심히 듣고 좋은 이미지를 남겼기에, 지인과의 관계를 잘 쌓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를 잘 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삶에 있어서 큰 계획을 세운 적은 없으나 그저 내키는 대로 - 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 살아왔던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내게 그런 행운들을 가져다주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 


비록 나는 하루키처럼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늘 삐걱거리며, 때로는 억지로 발을 떼 걷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나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가 닿을 것이라 믿는다. 아니, 설사 그 장소에 닿지 않을지라도, 예상치 못한 곳에 닿았다면 뭐 색다르니 오히려 좋다. 하루하루 매일이 행복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고 뭐.


2024년 4월 29일, 스물여섯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SJY
1.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이 문장은, 하루키가 꾸준히 '달리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이유를 나타내며, 넓게는 그의 삶의 철학이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처럼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꾸준히, 해내고 있는 일이 있을까요?


2. 책에서는 하루키가 소설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설명됩니다. 그것은 사실 원대한 꿈을 가진 것이 아닌,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이 되었어요. '당신 작품이 최종 심사 후보에 올랐습니다. (…) 내가 신인상에 응모했던 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나는 서른 살이 되어,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꼭 소설가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신진소설가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서 작은 이벤트가 또  길을 열어주었거나,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일로 인생이 바뀐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3.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아요.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1) 타고난 문학적 재능, (2) 집중력, (3) 지속력으로 꼽았아요. 여러분의 에너지를 쏟았던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요? (일이 아니라면, 공부도 좋고 전공도 좋아요!)

하루키는, 소설가란 교양 있게 커피를 마시면서 작업하는 일이 아니고 사실은 두뇌노동과 체력전에 가깝다고 해요. 여러분의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세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일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와 실제는 어떻게 다른가요? 


4. 하루키처럼 달려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이 달리고 싶은 장소를 묘사해 주세요. (어디든)


5. 여러분의 인생에서 비효율적이지만 의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나만이 지켜내는 원칙 같은 것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


6. 하루키는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적고 싶다고 해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묘비명에는 어떠한 글귀를 남기고 싶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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