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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간이 없어 글이 길어졌습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보통 나이는 시간이 가는 속도라고들 한다. 10대가 느끼는 인생의 속력이 10km/h라고 치면, 30대에는 30km/h로 10대의 3배가 되고, 70대에는 10대의 7배가 되는 꼴이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어(중반이라 우기고 싶지만) 한 아이를 길러내고 있는 지금, 이 말을 매 순간 절절히 실감한다. 하루는 너무도 긴데, 일주일이 돌아오는 속도는 너무도 빠르고, 1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수록 삶이 단조로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 해 인간관계는 단순해지고, 새로운 도전은 두렵기만 하다. 하루를 버텨내는 나의 실감은 다이내믹하기 그지없는데,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매일의 모습이 참 많이 닮아있다.


내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맞는지, 이대로 고여있다 썩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 다만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것인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깊은 방황을 하는 날이 많아진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어디서보다 단조로운, 게다가 희망조차 쉬이 발견하기 어려운 삶의 반복을 20년이나 해내었다. 물론 혹서와 혹한을 버텨내는 일이라던가 온갖 해괴한 인간 군상이 모이는 장소이니만큼 매일이 고난과 부침의 연속이었을 것은 틀림없으나 조금 멀리서 보면 쳇바퀴 도는 다람쥐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무기수인 그에게 있어서 '이벤트'라고 할만한 것은 창문이 있는 곳에서 문이 있는 방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거나, 드물게 들고나는 사람들일 뿐이다.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추워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뿐 날짜도 시간도 그곳에서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긴 여름과 긴 겨울의 '변함없는 변화'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저자가 펼쳐내는 사색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것은 작은 엽서이기에 앞서 한 인간의 반듯한 초상이었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이 책에는 반복되는 옥중 생활 속에서의 20년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통의 위인전이나 자서전에도 그보다 훨씬 긴 한 사람의 기나긴 인생이 담겨있긴 하지만 이 책은 회고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기록된 20년이라는 점이 큰 차이다. 69년부터 88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써온 글을 읽어가다 보면 나도 함께 익어가며 깊어지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사색의 깊이는 깊어졌을지언정 20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의 문체와 올곧음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는 것이 특별하다. 책의 앞쪽을 읽다가 마지막 장을 펼쳐서 읽어도 어제와 오늘의 연속인양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독서보다는 사색에 더 맘을 두고,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 구절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독서와 사색에 관한 그의 문장들이 여러모로 내게 참 위로가 되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사색', 나쁘게 말하면 '잡생각'이 너무도 많아서 책을 읽을 때에도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다. 한 줄을 읽으면 그 문장과 관련된 수만 가지 생각이 가지를 치며 따라붙는다. 늘 머릿속이 전쟁통이다 보니 마음도 쉬이 쉬지 못하고, 속독은커녕 어떤 때는 한 문단을 읽는데도 한 세월이 걸린다. 그래서 두꺼운 책을 몇 시간 만에 뚝딱 읽어내는 이들을 늘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그러한 나의 사색도 어느 날엔가는 나를 조금 더 깊어지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이기(利器)를 생산한다기보다 ‘필요’ 그 자체를 무한정 생산해내고 있는 현실을 살면서 오연(傲然) 히 자기를 다스려 나가기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재가 있는 사람의 글씨는 대체로 그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견 빼어나긴 하되 재능이 도리어 함정이 되어 손끝의 교(巧)를 벗어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필재가 없는 사람의 글씨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기 때문에 그 속에 혼신의 힘과 정성이 배어 있어서 ‘단련의 미’가 쟁쟁히 빛나게 됩니다.


컴퓨터 타자에 익숙해져 글씨가 점점 엉망이 되어간다. 이제는 한 줄 제대로 쓰려고 해도 땀이 삐질 나고 모난 마음처럼 모서리가 삐죽 튀어나와 버린다. 어디 그뿐이랴. 짧은 글에 익숙해져 호흡이 긴 글을 읽기도 점점 힘에 부친다. 어릴 때는 글 깨나 썼던 것 같은데, 서평을 쓸 때 외엔 '글'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쓸 일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맞춤법도 아리송하고, 내가 써낸 글이 유치하고 볼품없이 느껴질 때가 많다.


chat GPT의 요약 능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고, 대충 두루뭉술 단어만 조합해 던져줘도 GPT가 몇 초만에 뚝딱 명문을 완성해 내어 주는 시대다. 커서 딸깍 몇 번, 키보드 타닥 몇 번이면 너무도 쉽게 모든 것이 완성된다. 그러다 보니 사색이나 글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일이 우직한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일처럼 보이거나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스레 글을 읽고 쓰는 근육과 생각하는 근육도 모두 퇴화하고 있다. 저자가 글을 쓰기 시작한 초반의 나이가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 물론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비교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 내 주변에 저자만큼 생각하고 글을 써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의문이다. 문명의 이기 앞에 우리가 포기하게 된 것의 가치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그래서 작은 노력이나마, 나는 책을 읽기 전에 목차를 보지 않고, 영화를 보기 전에도 결코 줄거리를 보지 않는다. 더욱이 책이나 영화에 관한 나의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서평이나 평론을 찾아보는 일도 절대적으로 경계한다. (내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토론하거나 다른 시각의 후기나 평론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 좋아한다.) 목차나 줄거리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서평이나 평론을 읽으면 답지를 미리 보고 수학문제를 푸는 듯한 기분이 든달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힘을 잃지 않기 위해 지키는 작은 원칙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노력이 모여 나의 생각하는 근육이 힘을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이 사무치게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저자가 인간에 대해 가지는 시선이다. 저자는 가장 험한 곳에 있음에도 그 긴 편지에서 누구 하나 헐뜯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사랑한다. 서평에서 무수히 많이 밝혔지만, 나는 그런 소설, 그런 글, 그런 영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내 삶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사람을 보는 따스한 시선, 따뜻한 온기 속에서 나오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때로 상처받고 부대낄지라도.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분명 저자의 의도는 좋았을 것이나,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책의 완성도를 위해 억지로 살을 붙인 이야기들이 인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고 지루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바른 이야기, 뻔한 이야기를 함에도 그것이 지루하다거나 구태의연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이 글을 돈을 벌기 위해 쓴 것도,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쓴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가족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번뇌와 깨달음, 깊은 사색이 진실로 내 마음을 움직이고 물들였다. 정치색에 관계없이, 혐오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문명의 이기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한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글의 모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금 꺼내보고 싶은 문장이 참 많아 아래에 적어둔다.


#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내가 지금부터 짊어지고 갈 슬픔의 무게가 얼마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감당해 낼 힘이 나의 내부에,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풍부하게, 충분하게 묻혀 있다고 믿는다.


# 슬픔이나 비극을 인내하고 위로해 주는 기쁨,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物)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 저는 많은 것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 ‘눈물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흔히 강한 아들을 만들어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이야기가 군데군데 살아 있습니다. 애써 지으시던 담담하신 모습, 그 속에 담긴 엄한 가르침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 지독한 ‘지식의 사유욕’에, 어설픈 ‘관념의 야적(野積)’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늦게 깨달은 저의 치부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 10년. 저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더러 역마살이 들었다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道神]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 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 생활의 편의와 이기(利器)들이 생산해 내는 그 여유가 무엇을 위하여 소용되는지. 그 수많은 층계, 싸늘한 돌계단 하나하나의 ‘높이’가 실상 흙으로부터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은 사변의 날개를 달고 납니다.

#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 자연에서 오거나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정신의 특별한 훼손이 없이 감내해 나갈 수 있는 지극히 작은 것, 고통이라기보다 산다는 표시이고 삶의 구체적 조건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 젊은이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곧 나의 ‘사회학’이기도 합니다.


# 사람의 아름다움도 이와 같아서 타고난 얼굴의 조형미보다는 그 사람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이 내밀한 인격이 되어 은은히 배어나는 아름다움이 더욱 높은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첩경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旣存)과 권부(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KakaoTalk_20250326_003905648.jpg 2025년 3월 25일, 서른일곱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KHJ

1. 가장 인상 깊었던 편지는 무엇이었나요? 왜 그 편지가 인상 깊었는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2.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사색’하고 있나요? 일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깊이 사색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그 경험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3.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 어디까지 공감하시나요? “죄명은 그 사람의 '질'을, 형기는 그 질의 '정도'를 상징합니다. … 그러나 대개의 경우 전혀 판이한 본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 「죄명과 형기」 종이책 299p, 전자책 547p

저자는 죄명과 형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신의 습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자책하며, 진정한 이해는 곁에서 함께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죄의 경중을 떠나 사회에 피해를 끼쳐 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이기도 합니다.(누명 제외) 구치소 환경 개선, 범죄자 신상 공개 등 사회적으로 대립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범죄자에게도 존엄이 있다는 생각에 어디까지 공감하시나요?


4. 이 책에는 계절을 묘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일상에서 어떤 계절이 유난히 감정적으로 다가온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이 책을 읽으며 ‘계절을 느낀다’는 감각이 새롭게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면 공유해 주세요. (「이웃의 체온」, 「가을의 사색」, 「여름 징역살이」 등)


5. 저자는 글씨에 대한 철학(「서도」 - 종이책 173p, 전자책 314p)도 남다르며, 실제 서예가로도 다양한 활동을 하며 '신영복체'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처음처럼' 상표 등) 여러분은 평소 ‘글씨체’나 ‘손글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나요? 내 글씨체는 어떤지, ㅇㅇㅇ체가 출시된다면 어떤 특징과 철학을 담을지 이야기해 보아요


6. 저자는 20대 후반부터 20년 가까이 이어진 긴 수감 생활을 견디는 동안, 가족과 지인, 동료 수감자들, 그리고 기다려주는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단절된 공간 속에서도 ‘관계’를 통해 자신을 지켜냈고, 그것이 이 책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버티게 해주는 사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지점이 있으셨다면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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