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급류> 서평
사랑이란 건 거대한 마케팅 같아요. 제가 보기엔 잘 포장된 욕망과 이기심인데. 자기들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고. 그게 장사가 되니까요. 사과 로고처럼.
나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잡생각에 괴로울 때 화장대 앞에 앉는다. 미친 얘기 같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을 한참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내 얼굴 보는 게 좋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런 걸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는 거겠지. 세상에 나보다 소중한 것은 없고, 의심의 여지없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단연 '나 자신'이다.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늘 궁금했다. 20대 시절 부족함 없이 연애도 하고, 분명 뜨거웠던 적도 있었고, 실연 당해 울어도 보고,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도 해보고, 그 끝에 결혼도 했지만, 한 번도 나 자신보다 사랑한 이는 없었다.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남편도 잘 아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나를 내려놓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본 적도 없다. 분명 연인과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단지 그보다 나를 더,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한 탓이었을까.
그래서 사실 아주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하는 그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아이를 낳은 후 나 자신을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과 함께, 모든 걸 내던지고 나 자신을 잃어보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존재했다. 하지만, 웬걸. 이번에도 실패였다. 임신했을 때부터 나는 남들과 달랐고, 아이가 20개월이 된 지금도 다른 엄마들과는 모성애의 결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여전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공감되는 인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 있는 아내를 두고 바람이 난 파렴치한 불륜커플 창석과 미영은 말할 것도 없고, 상처 가득한 악연을 거슬러 끝끝내 만나고야 마는 도담과 해솔도. 자신을 배신하고, 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죽은 남편을 안타까워하며 오히려 딸을 미워하는 도담 엄마는 내 기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은 단연 선화. 얼마나 사랑하면, 어떤 마음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진심을 다해 그 사람을 돌보고, 희생할 수 있는지. 사실 도담과 해솔, 선화 모두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웠다. 사랑에 흠뻑 취해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것이. 왜 내게는 그런 감정이 없는 걸까.
누군가는 사랑이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했다. 그래, 교통사고 낼 수도 있다 치자. 그런데 책임도 안 지고 벌도 안 받으면 그건 뺑소니잖아. 가족을 속이고 상처 입히는 게 사랑이라면 도담은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누군가가 내게 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꼭 두 가지의 키워드를 말한다. '의리'와 '책임감'.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의리가 있고 책임감이 있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내 손을 꽉 잡아줄 수 있는 사람. 나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사람. 그게 내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살면서 연인이 나를 배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오히려 내가 남자 문제로 속을 썩이면 썩였지), 가족 중에 바람을 핀 사람도 없었는데, 나는 유독 어릴 때부터 불륜이 끔찍하게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작으로 꼽는 영화 <노트북>을 볼 때도 나는 자신들의 뜨거운 '첫사랑'을 찾아간다는 미명 하에 약혼남과 미망인에게 상처를 주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전혀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영화 <헤어질 결심>에 열광할 때도 나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정말 이게 좋다고? 나는 그 영화가 너무 불편했거든.
그러고 보니 <급류>의 주인공들과 <노트북>의 주인공들과 꽤나 많이 닮았다.
<헤어질 결심>에 낮은 평점을 주면 내 예술성의 밑천을 드러내는 것일까 고민했지만, 왓챠(평점 기록 어플)에서 결국 별점 2개를 매기고 말았다. 아름다운 영상미, 박찬욱 감독 특유의 디테일과 영화적 표현은 훌륭할지 모르겠으나, 결국 그런 것들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영화의 본질에서 나는 진심을 느끼지 못했다. 두 주연배우의 감정 흐름에 공감이 잘 안 되다 보니 - 스스로를 파괴시킬 만큼 사랑에 빠지게 된 개연성에 공감이 안되다 보니 - 사실 부수적인 요소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의 눈을 피해 불륜녀에게 문자를 보내는 찌질남이 '자부심'과 '기개(꼿꼿함)'를 논하고, 불륜녀로부터 '믿을만한 남자'로 표현된다는 것이 우스웠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포장하기엔 그들의 사랑이 추잡하게 느껴졌다. 불륜에 품위나 품격, 격조 따위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게다가 형사와 피의자의 사랑이라니... 모름지기 예술은 이래야 한다면, 불륜 없이 사랑을 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그냥 예술을 모르되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랑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영화도 책도 사랑이야기를 제일로 친다.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는 이른바 '쌍방 구원 서사'에 환장한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손이 데일만큼 펄펄 끓는 뜨거운 사랑은 아니다.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는 - 아무것도 내던지지 않아도 되는 - 잔잔하고 따뜻한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루는 건강한 사랑. 서로를 갉아먹지 않되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좋다.
사랑이 만병통치약일까? 아니, 도담과 해솔을 구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딛고 서지 못했을 때 그들의 존재는 오히려 서로에게 아픔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밀려드는 상처의 파도 속에서도 수영하는 법에 능숙해졌을 때, 비로소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 상처를 극복해 내는 과정에 꼭 선화나 승주가 필요했었냐는 것이다. 도담과 해솔은 선화나 승주가 없어도 혼자 힘으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인물로 보였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아직 나는 숭고한 사랑이라던가 위대한 모성애라던가 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더 흘러야 알 수 있을지, 이번 생에 그것이 가능할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너무도 무모하게도 감히' 한 생명의 우주가 되기로 결심했었기에 나의 책임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의 무모함이 어느 날 진짜 숭고한 사랑으로 가치가 부여될 수도 있겠지.
[발제문] by SJY
1. 해솔과 도담은 참혹한 상실을 경험하였습니다. 서로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아픔을 함께 겪어서일까요. 그 둘은 급류에 휩쓸리듯 사랑에 빠지게 되고, 지독한 운명처럼 이어지게 됩니다.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두 인물은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였을까요?
2. 소설에는 여러 형태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작가가 집중했던 창석-미영, 그리고 해솔-도담이 있었고, 해솔과 도담이 각자의 생활을 이어갈 때 만나게 되는 인물인 선화와 승주가 있습니다. 저는 해솔과 도담의 사랑이 이어지는 것만큼이나, 선화와 승주가 겪어야 했을 쓸쓸함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창석과 정미가 서로에게 품었던 감정이 어떠하였을지도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들을 지켜보면서 여러분이 느낀 감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3. 해솔은 약대를 진학하였지만, 창석과 같은 소방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해솔은 타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희생을 자처합니다. 이러한 해솔의 행동은 상처를 더 큰 상처로 덮으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성장과 회복의 과정으로 보아야 할까요. 해솔이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4.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우물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도담은 동질감을 느꼈다. 일하는 동안 승주가 늘 쾌활하고 밝은 모습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그간 도담에게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남자도 드물게 있었지만 도담은 자신만만한 그들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오히려 힘든 일을 겪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끌렸다. 이 사람은 내가 필요하구나, 하면 마음이 움직였다"
-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이나요? 꼭 이성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5.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 슬픔을 대하는 여러분의 자세는 어떠한가요? 그리고 행복을 대하는 태도도 궁금합니다.
6. '급류'에 빠지듯, 무엇인가에 빠졌던 경험을 해보셨나요?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든, 일이든, 공부든(?), 취미활동이든 무엇이든. 불가항력적으로 무엇인가에 빠져버렸던 경험이 있다면 공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