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땅의 것에도 관심을 두어라

그게 맞는 것일까

by 최명숙

나는 그림과 음악 철학 모두 잘 모른다. 가끔 집에 있는 서양미술사 책도 뒤적여보지만 작가 이름도 외우기 힘들다. 딸이 보던 음악사도 그렇다. 우리 가족은 무슨 일인지 모두 예술에 발을 담그고 있다. 아들은 서양화를, 딸은 작곡을 전공했다. 나는 문학이고 남편은 건축을 전공했으니 모두 예술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일맥상통하는 게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고 남편의 발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상이 같았기 때문에 잘 견뎌온 것 같다.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 그것 하나로.


그렇다고 땅의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요즘 더욱 그것을 느낀다. 내가 물질적으로 풍족하다면 아들에게 더 후원할 것 같고, 딸에게도 더 경제적 조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른 일 하지 않고 창작에만 열중할 수 있을 테니까. 나의 작가적 역량과 상관없이 그렇게 집중해보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질의 소유욕에서 벗어나면 가능한 일인데, 그건 무모하므로.


어릴 적에 친구들과 나물 뜯으러 갔다가 많은 곳을 발견하면,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이리 와. 여기 나물 많아!” 대답이 없어 뚤레뚤레 친구들을 찾아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홀린 듯 나물을 뜯고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나물 많은 곳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럴 때 소외감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다. 서늘하게 지나가는 찬바람 비슷한 느낌. 그래도 혼자만 많은 곳을 점유한 것 같아, 다시 외치곤 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나는 비교적 강의를 많이 배정받곤 했다. 다른 선생에 비해서. 언젠간 강의 배정을 못 받은 후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지도교수에게 내 것을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손한 짓이었다. 강의 배정은 지도교수 재량이었는데, 월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한참 나를 쳐다보던 지도교수는 알았다고 했다. 한 강좌가 후배에게로 갔다. 그러나 후배는 알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배가 얼마 전 내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 스스럼없이 대해준 내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괘씸했다.호의가 세 번만 계속되어도 특권으로 여긴다는 말도 있잖은가. 후배라는 것 때문에 챙겨주고 배려한 나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 탓 아닌가. 어쩌면 후배는 내가 예민해졌다고 느낄지 모른다. 퇴직하고 나니까 그런 거라고, 자기 관점에서 생각할지도.


나의 언행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역시 가족들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 곡해하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땅의 것에 관심을 덜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도. 그것은 이상이 같기 때문인 듯하다.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지 않는 것 말이다.


요즘 아들딸에게 다시 가르치고 있다. 땅의 것에도 관심을 더 두라고. 노년을 위해 준비하고, 물질도 축적해 놓으라고. 아들딸은 웃는다. 딸은 말한다. “엄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김 서방이 장난 아니게 물질주의자거든요.” 그만해도 다행이다 싶다. 사위에게 그런 점이 있는 건. 아들은 여전히 미소만 짓다가 말한다. “그러면 그림 그리지 말고 취직해야 해요.”그렇다면 취직을 권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들이 어떤 제도 안으로 들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이랬다 저랬다 나도 갈피를 못 잡는다. 어미의 마음일 때는 이게 맞고, 창작자의 마음일 때는 저게 맞는 것 같다. 불확정적인 게 없는 세상이어서 그런 걸까. 아직도 삶의 지혜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생활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럴 때 한 편으로 땅의 것에도 관심을 좀 두었더라면 지금 내 삶의 모습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물론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 약간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아들딸에게 다시 가르치고 있지만 그들은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심지어 농담으로 여긴다. 엄마부터 그렇게 해보란다. 그러다 우리는 웃고 만다. 이미 생각이 그렇게 굳어져 버렸는데 쉽겠느냐며. 결국 마무리 짓는다. 남에게 빌리러 가지 않고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살면 된다고. 그러다 조금씩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면 되는 거라고. 자식은 부모 닮는다는데, 어미아비를 닮은 아들딸이 걱정된다. 이제야 땅의 것에도 관심을 두라는 말이 늦은 건 아닐까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