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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May 03. 2024

여행은 언제나 옳다, 첫날과 다음날

여행


일상이 번잡하면 글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나만 그럴까. 한유하고 고요하게 지낼 적엔 이것도 글감, 저것도 글감, 쓸거리가 널려 있는데. 요즘 그랬다. 몸은 아프고, 할 일은 쌓여 있고, 온 천지에서 봄꽃은 나를 부르고. 그런 와중에도 여행이 나를 유혹해 더욱 글 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닥친 일만 가까스로 처리하고 뒷산에 오르며, 지천인 봄을 멀찍이 보고 있자니, 나날이 심드렁했다. 


다 밀쳐두고 떠나보자. 길 위에서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자. 아픈 몸을 안고도 떠날 생각하는 나를 어떻게 말릴까. 솔직히 차도가 있긴 하다. 깔끔하게 낫지 않아서 그렇지.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친구 ‘미’도 건강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더니, 못내 아쉬운지 자기 집으로 오란다. 그냥 가까운 곳이라도 다니며 함께 지내자고. 미의 집에 머물면서 근처 가볼 만한 곳을 둘이 사부작사부작 걷잔다. 좋은 생각이다. 나는 집을 떠나니 여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미는 자기 집에서 손님치레만 하게 되었지 뭔가. 


첫날 우리는 궁평항과 제부도로 떠났다. 궁평항에서 오랜만에 맛보는 회는 쫄깃하고 고소했다. 서해와 만나면서 나는 동해를 떠올렸다. 미와 여행을 계획할 적에 우린 동해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일까. 둘이라는 느낌은 정겨웠다. 팔짱을 꼈고 웃었으며 자연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근처 제부도에서 바닷가 거닐며 맨발이 되었고, 바다로 깊이 침잠하는 붉은 해를 보며 환호했다. 눈물이 날듯했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무슨 그리움이 나를 에워쌌다. 삶 전체에 묻어 있는 다양한 빛의 그리움, 추억이 될 그 순간, 우정, 찬 바닷바람 등이 이율까. 


어둔 바다에 밀려드는 흰 파도에 통증을 모두 실어 멀리 보낼 수만 있다면. 그러다 실제로 다 실려 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몸의 통증을 잠깐씩 잊었으니까. 밤까지 계속 물이 빠진 상태인 제부도, 우리를 환영한다는 몸짓 같았다. 밤바다는 추웠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바다를 느끼다 발걸음을 돌리며 아쉬움에 몇 번 더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어둠이 짙게 밀려들었다. 


미의 집에는 내가 머물 방이 준비돼 있다. 정갈했다. 여느 호텔이나 콘도보다 편하고 아늑했으며 따뜻했다. 친구가 함께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으리라. 온몸에 파스를 줄줄이 붙이고 눈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나를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한 미, 고마웠다. 미안해하는 내게 그래야 대청소하고 먹을 걸 좀 만들지, 안 그래?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미는 이렇게 만나 함께 지내게 되어 좋단다. 하긴 나도 그렇다. 


집 떠나면 자리 덧을 심하게 하는 나다. 늦게 마신 커피 탓인지도 모른다. 미와 나는 잠들지 못했다. 이야기하다가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잠들지 못하는 우리는 다시 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새벽에 간신히 눈을 붙였다. 잠들기 전까지 내 눈앞에는 제부도 앞바다가 넘실댔다. 붉게 바다를 물들이며 떨어지던 해도 불쑥불쑥 생각났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땐 다음날 아침이었다. 


잠 못 잔 우리는 커피 탓 하며 아침을 먹었고, 근처에 사는 친구가 합류해 셋이 반월저수지로 가 덱을 따라 걸었다. 몸의 통증을 완전히 잊은 듯 저수지 풍경과 대화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하고 속으로 웃었다. 확실히 못 말리는 나다. 열심히 걸었고 탄성을 질렀으며 많이 웃었다. 어릴 적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이를 불문하고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 시절의 추억을 꺼내는 게 현재의 결핍을 달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저수지 주변에 핀 꽃처럼 순수했던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게 힘이 되니까. 


많이 걸었고, 자연 속에서 결핍을 달랬기 때문인지 시장기가 올라왔다. 갖가지 채소와 고기를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소스에 찍어 먹는 월남 쌈을 먹기로 했다. 채소에서 다시 또 자연의 맛을 느끼며 나는 성실하게(?) 먹었다. 친구들은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럴 만하다. 나는 엄청나게 전투적으로 월남 쌈을 먹어댔으니까. 시장한 것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고, 유난히 위대(胃大)한 나니까. 실컷 먹고 나니 기분 좋을 만큼 포만감이 밀려왔다. 전투적인 내 먹성에 놀란 친구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둘은 두고두고 내 먹성에 대해 놀라워할 것 같다. 


여행의 참 맛은 좋은 사람과 걷고 먹고 대화하는 것이리라.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여도 좋고, 벗과 함께이면 더 좋다. 궁평항의 회와 제부도 바닷가, 낙조, 반월저수지 트레킹과 월남 쌈, 나눈 이야기와 자연 속으로 날려 보낸 우리들의 웃음. 이대로도 좋다. 바쁘게 살다가 가끔 만나는 휴식 같은 달콤한 시간, 일부러라도 만들어 몸의 긴장을 풀어주면 좋으리라. 그래서일까. 몸의 통증을 잊어버렸다.

 

전날 못 잔 잠을 벌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날에 이어질 여행에 대한 설렘 때문이었다. 친구 미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대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첫날과 다음날의 행복감이 통증을 다 데려간 듯하다. 아, 여행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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