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내가 빌려온 판타지소설을 어제저녁부터 읽고 있다. 깊은 밤까지 읽는 걸 보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판타지소설로 유명한 작가가 쓴 네 권짜리다. 나는 웹이나 판타지 같은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개연성이 없고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흥미가 유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이 네 권의 책을 이 도서관 저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린 것은, 가독성이 뛰어나고 묘사와 서사가 촘촘한 수작(秀作)이라는 평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은 눈이 잘 안 보여서 못 읽었고, 어느 정도 회복된 지금은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못 읽지만 어떻게든 읽으리라 생각해 붙잡고 있다. 거실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고. 어제저녁에 그걸 본 아들이 집어 들더니 먼저 읽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했다. 자정이 거의 다 됐을 때 아들 방에 가보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재미있단다. 독서 취향은 다 다르니까. 침실로 들어가 아들을 위해 대출 기간을 연장했다.
*튜브를 열었다. 나의 독법이 문제인가, 아들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몇 군데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웬만큼 들으니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와 가독성이 없었던 이유를 알겠다. 그렇다면 다시 도전이다. 독서토의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무척 흥미롭게 읽은 모양이었다. 결론은 독법의 문제가 아니고 판타지소설을 자주 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화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를 갖고 있다. 소설도 물론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화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다르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개연성과 인과성이 있어야 한다. 판타지소설은 그 본질부터 다르다. 판타지소설인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가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인들의 흥미를 집중시켰지만 나는 이상하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자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소설을 써보라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잘랐다.
사람이 사는 데 취향이 얼마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모른다. 독서도 분명히 취향이 있고 글을 쓰는 것도 취향이 있다. 모두 다 좋아하고 느끼고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면 읽을 필요가 있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취향만 따르기보다 다양한 작품을 읽고 창작해 지경을 넓히는 것 또한 도외시할 수 없다. 내가 판타지소설을 읽으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문창과에 다닐 때 판타지소설을 써본 적 있는데, 그때 후련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기억해 냈다.
대학원 재학 시절 인터넷 게시판 소설에서 명성을 날리던 그 작가의 웹 소설을 분석해 논문을 쓴 적도 있다. 사이버소설과 관련한 저서를 공동으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십 권에 달하는 판타지소설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읽으며 나는 이런 소설을 못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상상력과 환상성은 어찌나 깊고 넓은지 나로선 이해불가였고 상상초월이었다. 그래도 그것을 분석해 논문으로 썼으니 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에서 그것을 꺼내 읽어볼 용기는 없다. 얼마나 허술하고 조악할까 싶어서다.
소설 창작 이론과 실기가 숙지되고 숙련되지 않고 판타지소설을 쓸 수 없다. 그는 그런 모든 게 장착된 창작자다. 그의 작품을 나는 싸움하듯 읽어야 하리라. 그처럼 쓰고 싶어서가 아니다. 입에 대지 않는 어떤 음식처럼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장르에도, 이젠 관심을 두고 읽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성문학의 엄숙성에서 벗어난 작품이 수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판타지소설이나 웹 소설을 재구성해 생산되는 영화와 드라마는 또 어떤가.
재미있는 건 웹상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문학은 대부분 판타지다. 나도 여러 글쓰기 플랫폼에 소설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그때도 나는 본격소설을 연재했지만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곤 했다. 대부분 판타지소설이었다. 끝 간 데 없이 상상하고 그것을 문장화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게 놀라웠다. 대부분 젊은 작가였지만 그들의 대단한 상상력은 부럽기도 했다.
늦게까지 판타지소설을 읽은 아들은 아침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독서대에 펼쳐 있는 걸 보니 거의 끝부분이다. 꽤 두꺼운데 재미있고 가독성 또한 있는 모양이다. 나는 오후부터 1권을 읽기 시작하리라. 읽으면서 환상의 그 나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나도 떠나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