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벨로퍼 라이프
9. 스물네 가지 서류
2016년 7월 13일 수요일, 맑음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했다. 농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은행으로 들어갔더니, 먼저 도착한 신우건설 김 대표가 2층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이곳이 아니랍니다. 대출은 다른 데서 한다고 하네요?”
그러니 김 대표도 지점장과 막역한 사이는 아닌 듯했다. 현장소장 준열까지 각자 차에 올라 새 지점 주소로 향했다. 그렇게 만난 지점장은 작은 얼굴에 오똑한 코를 가진, 꽤 미인이었다. 함께 동석한 실무자가 말했다.
“농협은 담보대출 외에는 현재 취급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알아봤더라면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유쾌하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뵙겠습니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우 지점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알려줬다.
“좋은 저축은행이긴 한데요. 금리가 준공까지 10%랍니다. 좀 세네요.”
시공 권한을 건축주에게 맡기는 조건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준공 후에는 “통대출은 농협에서 가능합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채무자들은 이렇게 금융권을 돌고 돌며 은행에 수익을 내어준다.
은행을 나서며 김 대표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잘 알아보지 않았네요.”
초라해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어제 동진신협에서 건축자금을 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맑음
전화기를 무음으로 해 둔 탓에 몇 통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내가 전화를 걸어 확인하자 상대가 말했다.
“사장님, 철근 업체입니다. 계약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어디로 갈까요?”
“안양역으로 오시면 되는데, 오전 12시 이전이나 오후 5시 이후에 오셔야 해요.”
“그러면 시공사 들렀다가 12시 이전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감증명서와 신분증 사본 부탁드립니다.”
날씨는 찌는 듯 더웠다. 샤워하고 안양4동 사무소로 가서 인감증명서 5통을 발급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김밥을 한 줄 샀다. 더위를 피해 고시원 407호로 내려가 에어컨을 켜고, 김밥을 먹으며 철근 업체 직원을 기다렸다. 계약서 작성은 5층 펜트하우스에서 했다. 계약서 내용은 ‘지연이자 12%’ 외에는 특별한 조항이 없었다.
2016년 7월 15일 금요일, 맑음
식수가 부족했다.
수돗물을 끓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벽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풍기를 들고 서재로 가 인천 [피렌체하우스] 계좌에서 신우건설 계좌로 500만 원을 이체했다.
드럼 스틱이 든 가방을 들고 농협으로 향했다. 100만 원을 인출해 명성 컨테이너 계좌로 송금했다. 현장소장 준열이 컨테이너 안에 쓸 집기류도 알아보겠다고 하기에 나는 말했다.
“내부는 없어 보이게 하지 말고. 사전 분양 계약자들도 올 수 있으니 목수 불러서 간지 나게 해요.”
“걱정 마세요. 현장에선 다 방법이 있습니다. 참, 그리고 전화랑 인터넷 신청해 주십시오.”
전화는 안양 [피렌체하우스]와 같은 20번을 쓰는 032-537-2000번으로 정했다. 인터넷 요금은 1년 약정에 4만 원 정도가 나온다기에, “인터넷이 꼭 필요한가?”라고 물었다가 “당연하죠. 기본이죠.”라는 반박을 들었다.
동진신협 현 팀장도 대출에 필요한 서류 목록 사진을 문자로 보내왔다. 무려 24개 항목이었다. 나는 신우건설 김 대표와 현장소장 준열에게도 그대로 전달했다.
(문자 수신) 대출 준비 서류 목록
1. 공사 관련 서류(건축주 또는 시공사)
표준도급계약서
공사비 내역서
건축허가서
사업계획서(수지분석 포함)
공사 공정예정표
건축부지 매매계약서
설계도면
착공신고필증
2. 시행사(건축주/채무자)
인감증명서 3통(대출·신탁·인증 용도)
주민등록등본 1통
주민등록초본 2통(대출·신탁 용도)
소득증명 서류(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또는 소득금액증명원 또는 국민연금·의료보험 납부확인서)
국세·지방세 완납증명서 각 2통(대출·신탁 용도)
등기권리증
신분증
인감도장
3. 시공사 보증인
법인 인감증명서 4통
법인 등기부등본(등기사항 전부)
사업자등록증 사본 2통
법인 정관 사본(원본대조필)
주주명부
재무제표(전년도)
국세·지방세 완납증명서 각 2통
이사회 회의록
대표자 인감증명서 1통, 주민등록초본, 신분증
법인인감도장
잠시 뒤 현장소장 준열이 전화했다.
“시공사 대표 개인 인감은 연대보증 서라는 뜻인데요. 그것만은 안 된다고 부탁해 둔 상태거든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대보증? 그거 걱정할 일이 있어? 내가 다 커버하잖아.”
그러자 준열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게 아니거든요. 한번 김 대표랑 통화해 보세요.”
나는 곧바로 동진신협 현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비 서류 중 시공사는 6월에 설립된 신생 업체입니다. 재무제표도 없고 연대보증을 설 게 없어요. 어차피 저 믿고 가는 거니 제 빌딩 담보로 잡고 가죠.”
현 팀장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러긴 한데요. 감사 나오면 우리가 걸립니다. 그러면 연대보증은 안 하는 걸로 하고요. 사업자등록증 사본, 법인 정관 사본, 이사회 회의록, 법인 인감증명서, 법인 도장, 대표자 신분증, 유치권 포기각서까지로 하죠.”
“그래요. 그게 좋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신우건설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일부러 웃음 섞어 세게 던졌다.
“도와주시려면 옷 홀딱 벗고 도와주세요. 제가 은행에 전화해서 살살거리는 거 못 합니다. 연대보증 서시죠?”
김 대표가 놀라 말끝을 흐렸다.
“네에? 아니 그게요…”
나는 크게 웃었다.
“하하! 연대보증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은행이랑 통화해서 정리했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문자로 보냈습니다. 도와줄 때 멋지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처음엔 사람들과 잘 안 친해지지만, 친해지면 괜찮습니다.”
김 대표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착공신고는 월요일로 미뤄졌다. 수도관 연결공사도 진척이 없었다. 현장소장 준열은 옆 카센터 업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물탱크에 물을 채워 현장 인부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한 사진을 보내왔다.
https://youtu.be/hL5QAho6LY8?si=BJDTxcIYLhE8uW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