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날의 순정
소년은 아침부터 신이 났다.
큰누나가 몇일동안 편물기계를 돌려가며 양모 털실로 짜준 군청색 바지에 살색독고리(니트 비슷함) 새옷에다 손수건을 앞가슴에 달고 장날에 엄마가 사온 파란색 장화를 신고 보무도 당당히 학교로 뛰어갔다.
장사하느라 엄마는 입학식에 못가시지만 엄마보다 젊고 예쁜 큰누나가 따라와주니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
평소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때는 아버지가 사준 연두색 고무신을 신고 다녔지만 오늘은 선반위에 고이 모셔둔 윤이 반짝반짝거리는 장화를 신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진짜 날아갈 것만 같아 너무 좋았다.
운동장에서의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니 선생님이 자리를 정해주셨는데 앞에서 세번째 줄이다.
후다닥 들어가 자리에 앉으려던 소년은 옆자리에 여자아이가 먼저와 앉아 있는 걸 보고 애써 외면을 하고는,
나무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아 가방을 벗다가 그만 여자아이의 팔을 건드렸다.
아야!
소년이 깜짝 놀라 고개를 슬그머니 드는데 여자아이는 팔이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입으론 웃고 있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고 머리위에 하얀띠를 둘렀는데 순간 어린 소년의 가슴은 숨이 막혀오고 콩당콩당 뛰면서 떨려와 죽을 것만 같았다.
소년은 아프게 한 게 미안해서 짝꿍인 여자아이쪽으로는 제대로 얼굴을 돌릴수가 없었다.
로사.
소년의 짝꿍 여자친구이름이다. 옆집사는 한살많은 선희만 예쁜줄 알았는데 선희보다 몇배나 더 예쁘다.
학교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로사는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오셔서 아빠등에 매달려 먼저갔다.
소년은 자전거 뒤를 따라서 엄청난 속도로 쫒아가보았지만 로사가 탄 자전거는 훨씬 더 빠르게 신작로 길을 앞질러 멀리 가버렸다.
꼭 로사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려고 결심했는데 동네아이들과 격렬한 전쟁놀이를 하다 개울가에서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몇일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침 잘놓는 할아버지집으로 소년을 들쳐엎고가 무시무시한 침 몇대를 맞히고는 몇일 학교가지말고 집에서 쉬라 주의를 주었다.
학교에 못가는 건 그다지 아쉽지않지만 로사얼굴을 못본다는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학교에 안간지 이틀밖에 안됐는데 담밖에서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와 소년은 조바심이 났지만 다리가 아직 많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심해 눈을 꼭 감고 참았다.
" 용식아. 친구왔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 다리아파서 안놀아."
그런데 방문이 열리고 엄마뒤로 로사가 따라 들어왔다. 로사엄마도 뒤에 서 있었다.
소년은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마디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데 로사엄마가
" 로사가 너 아파서 학교 못가고 있대서 같이 왔는데 너 많이 아프구나. 로사가 너 줄려고
과자도 가져왔는데."
" 자. 이거 먹어."
로사의 작고 예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소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로사를 쳐다보았다.
로사얼굴을 못본지 겨우 이틀밖에 안됐는데
여전히 예뻤다.
" 잘 먹겠습니다."
" 너 이제 낼 학교오는거야."
" 응. 낼 갈거야."
로사는 로사엄마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소년은 로사가 주고간 선물 크라운산도를 한개도 안먹고 머리맡에 두고
낄낄거리며 웃다가 잠이 들었다.
소년은 로사와 이학년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짝꿍은 아니지만 로사와 학교끝나고 집에 갈때면 개울옆으로 난 소로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같이 걸어갔다.
여름에 개울가 뽕나무에서 오디도 따먹고 한움큼 더따서 로사에게 나눠 주었다.
로사는 예쁜 얼굴만큼 공부를 잘하진 않았다.
받아쓰기 시험보면 두개나 틀려 소년이 가르쳐주기도 했었는데도 여전히 두개씩은 꼭 틀렸다.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남자 여자로 반이 나눠지는 바람에 소년과 로사는 헤어져야 했다.
삼학년이 되면서 로사는 자기반 여자애들하고 잘 어울려다녔고 집에도 걔네들하고 자주 같다.
소년은 교문앞에서 로사를 기다리다 그냥 혼자 집으로 와야했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소년을 불러
" 용식이 너 웅변대회 나가보자.선생님이 가르쳐줄테니까 해봐."
선생님이 써준 원고로 몇일 외우고나서 친구들 앞에 나가서 실전같은 연습을 했는데 이번엔 옆반에 가서 해보자며 옆반으로 소년을 데리고 갔다.
옆반엔 로사가 있는 반이라 소년은 기분이 들떠 선생님을 따라 옆반 교실로 들어가 교탁앞에 섰다.
창가쪽 중간쯤 자리에 로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이 연사 목놓아 소리높여 외칩니다! '
10분이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났다. 로사는 뭐라고 할까 궁금했지만 교육청에 가서 군내 웅변대회에 참가하고 난 후 학교에서 마주쳤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로사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듯 해 안타까웠는데 소년은 얼마후에 지방 소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어
세상에서 젤 예쁜 여자친구 로사와 헤어졌다.
이후 로사네도 가족이 모두 다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소년은 더는 로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