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테르의 편지.
친구여.
아카시아 꽃내가 숲속 가득하게 퍼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성황당이 있던 곳 뒷편 호숫가로 올라가는 중이네만 오솔길 사이로 가득한 아까시아꽃잎이 너무 좋아 옛 생각하며 같이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릴 적 숨을 헐떡거려가며 올라와 호숫가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놀던 추억이 새삼 떠올라 다시 찾아왔는데 예전 같지 않으이.
우리가 놀던 호수가 이리 작았던가.
우리 눈높이가 높아져 호수가 작게만 보이는 건가.
호수를 빙 둘러 서있던 나무들도
그때의 나무들이 아니고
물수제비를 만들어도 건너편에 닿을 수 없었던 호수가 지금은 그만 바닥이 보이고 있네.
꽃잎지고 잎파리만 무성한 라일락나무 그늘아래서
죽도록 사모하는 여인에게 편지를 쓰던 그 옛날 베르테르의 감성으로 나도 편지를 쓰고 있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모의 정이 깊어지면 질수록 샤를롯테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낀 베르테르도 한동안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했다 잖은가.
샤를롯테를 잊으려 애쓰다 결국 전장에 자원해 가려 했다지.
감수성이 남다르고 격정적이고 다혈질인 베르테르 그에게서 왠지모를 연민이 가네.
따져보니 비슷한 구석도 많은것 같으이.
순수하고 감성적이고 정열적인 그가
이루어질수 없는 인연에 몰입하게 되면서
고독과 외로움의 시어로 가득 채웠을 수많은 편지를 떠올리면서
나 또한 같은 내용의 편지를 수도 없이 쓰고 있네. 베르테르가 샤를로테에게 첫눈에 반해 애태우듯이 나도 어느 여인을 만나고나서 그만 눈꺼풀에 콩깎지가 씌여져 앞도 잘 안보이고 사리분별도 어두워가네.
반면 의지는 더욱 생겨나고 욕망은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있다네. 뭔가 앞 길이 밝지 많은 않아 보여 석연치 않음에도 발길은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다네.
친구여.
오월이 오면
떠나야 할지 모르겠네.
머물 까닭이 없어지게 되면 이제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을것 같으이.
자칫 주저하다가는 자존감까지 상하게 될터라 미리 돌아서려는 걸세.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아카시아꽃이 큰나무 가득 열리고 향내음이 아무리 좋다한들 내가 찾는 라일락꽃이 지고 나면 의미 없는 일아닌가.
지금 내가 처한 현실도 그대가 짐작했던 바 그대로 일세. 순응하며 적당히 처세해야 하는데 그리 할 수는 없었네.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자리를 떠야할 결단의 시간이 올거고 그렇게 한번 떠나면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기 힘들걸세.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 말 한마디면 머물러 있을수도 있겠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결코 포기해선 안될 수많은 굳은 결의들이 자리하고 있네.
포탄이 터진 자리에 수많은 죽엄이 쌓이고 그 위론 화염이 번지고 포연에 휩싸이는 전쟁터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치열한 전장같은 곳으로 가야 한다네.
먼 후일
포연이 사라지고 상흔도 사라져 다시 여기 라일락나무로 둘러쌓인 호수에 올라 언덕아래 강물을 바라보는
노병이 되어버린 그날이야
새까맣게 다 잊혀져 버렸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 조금은 힘이 들것 같네.
베르테르를 따라서.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해거름이 길게 늘어지니 석양도 더 넓게 퍼져 서쪽 하늘이 온통 벌겋게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주제로 서너시간씩이나 논쟁을 벌여가며 회의를 하고 있다. 파업 D-day를 놓고 예정대로 파업을 강행할지 아니면 좀더 사측과 협상을 하고 나서 진행할지를 놓고 갑론을박 목소리를 높에 열들을 내고있다.
발언을 할 내용을 핵심만 요약해 회의자료 여백에다 메모해놓고 발언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용식은 회의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날 밤 일이 생각이나 회의자료를 덮어놓고 눈을 감고 곰곰히 되새겨보았다.
' 정희씨 사랑합니다.'
정희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귀여운 덧니를 드러내고 웃음만 지을뿐.
나 역시도 더이상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오늘 이자리에서 그녀의 답을 들으려 고백한 것도 아니었지만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정규의 중국집을 나서니 막차는 이미 끊겼고 택시 역시 잡기가 쉽지않았다.
별수없이 건설업을 하는 절친한 선배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차를 빌렸다.
운전면허를 따고 더러 선배와 낚시를 다니면서 선배의 차를 몰았던 경험이 있어 익숙하기도 했고 선배 역시 언제든 호의를 베풀던 사이라 흔쾌히 차키를 내주었다.
어두운 소양강변을 달리는 동안 용식과 정희 두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괜시리 어색해져서 음악이나 듣자며 카오디오를 틀으니 이문세의 노래가 곧바로 이어졌다.
새벽 어둠 속에
그대의 미소 볼 수가 없었네
돌아가는 모습도
가로등 불빛 아래 멀어져 가네
그렇게 떠나네
그대 밤이 머무는 곳에
비가 조금씩 차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다. 고개를 넘어서니 읍내로 이어지는 도로변 가로등 불빛들이 빗물에 젖어 크게 번지며 빛나고 있었다.
정희의 집은 군청으로 가기 전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어 바로 집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 잘들어가요."
대답없이 고개짓으로만 인사를 하고 정희는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성우가 되고자했던 꿈이 꺾이고나서 그냥 사는대로 살자며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우연히 마주친 정희 그녀가 다시금 꿈을 향한 욕망이 일어나게끔 의욕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정희로 인해 의욕이 살아난 용식은 점점 그녀를 향한 연모의 정이 커져만 갔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탓에 현실에서 생겨나는
부정하고 비겁한 문제들, 즉 직장내에서 당연시해온 상사들에 의한 비인격적인 망언과 성차별적인 장면들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경우 친분여부와 관계없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섰다.
용식은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을 습득하는 특별한 과정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이력과 과정자제가 역사였고 그런 환경으로 인해
권위적인 위계 서열을 강요하는 관료사회의 지배질서논리를 극도로 혐오했다,
직원들은 그런 용식의 행동이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인식하는 한편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입사 후 용식을 처음 본 정희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는 점 외에 용식에게서 그리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
직원회의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어쩌다 회식에 참석했을때에도 직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술만 몇잔 마시고는 먼저 갑니다 딱 한마디만 남기고 뒤도 안돌아보고 자리 를 떴다. 간부들도 그 서슬에 눌려 쉽게 말을 붙이거나 농담조차 하지 못했다.
노동조합활동이 워낙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맡기를 주저해 대표를 뽑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용식은 자신이 추천을 받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 해봅시다."
별다른 감회나 수식없이 짧고 단호한 말로 쾌히 승낙했다.
남자직원들은 지나치게 강해보이는 용식은 왠지 부담스러워 나이도 많고 차분하고 합리적인 인상의 다른 남자직원을 밀기로 사전 협의를 하고 분위기를 몰고가기 위해 먼저 추천을 했었다.
남자직원들이 자신들만의 의견으로 일방적으로 몰아가려하자 여직원들은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있는 용식을 끄집어 내 분위기를 바꾸려했다.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받지 않아 용식이 어떤 인물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노조대표는 강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며
평소에 바른 말을 한다고 싸가지없다는 뒷말을 들어온 여직원이 적극적으로 용식을 추천하고 나서면서 분위기는 일시에 바뀌었다.
남자직원들보다 여자직원들의 수가 더 많았고 후일 용식이와 절친한 선후배로 두터운 사이가 된 윤경석도 일어나 용식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다.
후보가 양립하는 관계로 투표를 진행, 투표결과 용식이 과반을 넘는 득표로 다수표를 얻어 노조대표로 선출되었다.
" 저는 용식씨 안찍었어요. 너무 강해 보여서
그땐 부담스러웠어요. "
" 요즘와선 생각이 바뀌었지만요."
소설 태백산맥을 선물로 주고 난 후 함께 자리했던 다방에서 정희가 건넨 말이었다.
노조를 부정하고 직원들을 무시하는 권위적인 상사들의 태도와 근무환경을 확실하게 바꾸어내려면 용기있고 헌신적인 사람이 노조대표가 되어야 한다며 용식을 지지하지 않았던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꼬박 사흘동안 정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사전 예고도 없이 불쑥 꺼낸 고백이 쑥쓰럽기도 했지만 그녀의 대답을 쉽게 듣고 싶지않아서 조급하게 연락을 하지않은 것이다.
목요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이 부산스러웠다. 가까운 산에 불이 났다며 면사무소 직원들이 산불진화작업을 위해 도구를 챙기며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의 인상좋고 너그러운 면장이 김용식씨도 같이 갑시다라며 말을 건넸다.
파견나온 다른 기관의 직원을 구분하지않고
자기 직원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면장의 말이라 재고 자시고 할 게 없어
" 알겠습니다."
용식은 책상위에 펼쳐놓은 서류를 덮어 가지런히 모아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책상위 전화벨이 울렸다.
" 저예요. 과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오후에 들어오시랍니다."
" 무슨 일입니까? "
" 모르겠어요."
" 알겠습니다. 지금 산불진화작업 나가야하는데 오후에 들어간다고 전해주세요."
" 저기요. 토요일날 놀러가도 되요? "
정희의 뜻밖의 목소리에 즉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김용식씨 빨리 갑시다 동갑내기 면사무소 직원이 용식의 옆을 지나치며 재촉을 한다.
" 예. 갑니다. 정희씨. 기다릴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