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운용 Sep 09. 2021

강남 갈 일이 생겼다.


큰누님이 사시긴 해도 특별히 볼일이 없는 곳인 강남을 지난주에 다녀왔다.


친분이 있는 변호사가 법률사무소를 새로 열었다는 연락을 해와 인사차 방문을 했던 건데 개업을 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찾아갔으니 성의가 너무 부족했다.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원한을 산 일도 없는데 강남 가는 길이 낯설고 멀게 느껴져서 연락을 받고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다.


주차를 하고 사무실로 올라가니 김 변호사가 반가이 맞아주는데 빈손으로 악수하기가 미안했다. 개업 축하 화분이라도 미리 보낼걸 아차 싶었다.




김 변호사가 안내하는 상담실로 따라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미안한 마음부터 표시해야겠기에 부질없는 인사말을 먼저 건넸다.


" 변호사님. 진작 찾아왔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화분이라도 사 와야 하는데 강남 오기가 워낙 멀어서 빈손으로 왔습니다."


"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다른 직원들한테 들었습니다. 직장 게시판에 저 퇴임했다고 장문의 인사말까지 올리셨다는 얘길 듣고 감격했습니다. "


" 아하! 그거야 의리 아닙니까. 김 변호사님이 여러모로 도와주셨잖아요."


" 제가 도운 게 뭐 있나요. 선배님이 오히려 경영진 입장에서 일할수밖에 없는 절 이해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힘이 많이 됐습니다."




김변호사의 말은 사실이다.

김 변호사는 본사 법무실에 근무했는데 직장 대외 문제뿐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 직원이 관련된 사건 법적 조치 및 소송을 전담하고 있고 연관된 업무까지 맡고 있어서 사실상 이사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다 보니 노조와도 대립해야 하는 일이 빈번해져 고민 끝에 그때마다 김 변호사는 따로 내게 연락을 해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정보도 건네주었다.


자신은 공단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사장의 사적인 일에 이용되거나 공적인 일이라 해도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동원되니 갈등이 많았었다고.


특히 나를 향한 불법적인 사찰과 증거조작을 지시하는 행위가 이루어지자 그 괴로움을 못 견뎌했었다면서


몇 날을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어왔다.


" 저 김준태 변호삽니다.  선배님을 사찰하라는 불법적인 지시가 있어 증거를 메일로 보냈습니다. "


원체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라서 평상시에도 목소리가 작았는데 죄송하다며 미안해하는 그날 전화 속 김변호사의 목소린 더더욱 작아져 있었다.




나는 시설관리 주무 담당자로서 구내식당 운영권을 정당한 이유 없이 빼앗아 자신의 동생에게 넘겨주려는 당시 정모 이사장의 부당한 행위를 보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었다.


자기 동생에게 본사 구내식당 운영권을 넘겨주려는 계획을 시도하려다 제동이 걸리자 내 뒷조사를 하라며 이사장이 지시를 했고 지시를 받은 법률팀 실무 부장이 다시 김 변호사에게 보낸 카톡 내용을 내게 보내고 나서 전화를 했던 것이다.


나와 관련된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도  

동료직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일들을 해야 하는 지시를 받고 몇 번이나 힘들어하다 짧게 스치듯 지나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었던 사이라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률팀에 변호사를 비롯해 다수의 직원들이 있는데도 부당한 지시의 문제점을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순하디 순한 김 변호사를 더욱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김 변호사의 성격상 변호사로서의 양심, 같은 직장을 다니는 동료직원으로서의 인간적인 면으로도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내 뒷조사를 해 증거를 확보하라 지시한 이사장이나 실무 부장도 법과 양심을 지키겠노라 사법연수원 수료 시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를 했던 변호사들이었다.




김 변호사는 누적되는 부당한 직무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지방으로 본사가 이전해 가족과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 등의 이유로 사직서를 내고 명퇴를 했다.


커피 안 드시는 걸 습관을 기억하고 있다며 녹차를 타서 건네면서 자신의 소심함을 일깨워준 선배님을 존경해왔기에 너무 미안했고 법률사무소 개업하고 나서 꼭 한 번은 모셔서 술 한잔 대접하려 했다고 거듭  강조하는 김 변호사를 쳐다보며 비록 외모는 깡마르고 연약해 보이지만 양심적이고 인간적인 품성을 가진 좋은 사람이구나 새삼 느꼈다.


날 위해 자료를 넘겨준 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이 주어질 수도 있었는데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는 다른 일정이 있어 오늘은 가야겠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왔다가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방문 확인 도장이 찍힌 주차권 세장을 내밀었다.


시간이 초과될지도 모르니 넉넉하게 가져가라며 손에 쥐어주었다.


다음번엔 퇴근시간 맞춰오세요. 제가 강남에서 근사한 데로 모시겠습니다며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사이로 김 변호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이젠 강남 올 일이 생겼구나 속으로 웃으며 그랜드 카니발의 시동을 걸었다.




배경화면은 강남이 아니라 공덕동 사거리임.

매거진의 이전글 옆집에 아기가 태어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