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 to Z

믿는 마음

열두 번째, L

by 연Yeon

물속을 걷는 듯한 습한 날 서울역 근처에서 L을 만났습니다. 도저히 바깥에선 맥을 못 출 날씨라 조금 한적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어요. 우리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으레 나누는 질문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일과 취미, 가족 이야기 같은 것들. 그리고 L은 내게 종교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신을 믿냐고요 (사이비는 아니었습니다 하하).


저는 무교입니다. 종교는 없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불교를 좋아합니다. 불교신자인 엄마와 학부시절 배운 지식 덕분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종교보다는 학문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종교를 공부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길 바라고 불교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이니 그것이 마음에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신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도 않아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다만 신은 개념에 가까운 것이라 믿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론 알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신이라는 개념에 맡겨버린 거죠. 무지는 곧 두려움이므로.


L 역시 종교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고도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단,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을 불가지론자라고 하더군요. L은 제 입장 역시 불가지론의 갈래 중 하나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개미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입장에서 우리는 개미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거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 판단은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런데 L은 종교를 가지고 싶다고 했습니다. 종교인들의 안정감이 부럽다면서요. 그 순간 독실한 기독교도인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공평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요. 신이 있다면 모두가 공평해야되는 것이 아니냐는 제 푸념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운은 분명히 달라. 하나님이 모두에게 똑같은 운을 주지 않은 이유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도와가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이지. 그게 사랑이야.”


그 말에 완벽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저는 친구의 믿음에 조금 놀랐습니다. 동시에 부럽기도 했어요. 그 애는 회복탄력성이 아주 좋은 사람인데 그 기반엔 종교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짐작했습니다.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의 심리적 안정감과 충만함을 저도 느껴봤으니까요.


어릴 적 아주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고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어요. 넓은 들판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쳐도 굳건히 버텨내는 나무. 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 보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요.


이제는 그때가 까마득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고 우리의 관계 역시 많이 달라졌지만, 인간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제든 의지할 수 있고 의심없이 믿을 수 있는 것. 믿음의 형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무엇을 믿고 싶으냐에 따라서요. 그것이 누군가는 자기 자신일 테고 또 다른 이는 존경하는 어떤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경험에서 비롯된 신념이거나 절대적 존재일 수도 있죠.


저에게 그것은 대체로 나무라는 형태를 띤 사람이었고 언제 사라질지 모를 타인을 믿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자주 길을 잃고 고꾸라졌던 것은 그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L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지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므로 절대적인 믿음에 의지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일까요. 그래서 인간은 신을 믿어온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정말 대단한 것은 신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 좇는 인간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고 증명되지 않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변적인 것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걸 믿는 마음이요. 그러니 당신이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불가지론자이든 이 무형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신의 존재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어요.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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