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소연 Oct 01. 2023

명절 차례상에  카스텔라를 올리는 이유

서울에 여덟 살에 올라와 서른네 해를 산 나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제주도에 내려와 섬사람들의 풍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삶의 양식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섬사람들은 자연의 순리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제주 땅에는 메밀꽃이 한창이다. 검은 땅을 뒤덮은 흰 꽃들이 안개처럼 군무를 이룬다. 메밀은 강원도가 주산지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제주는 지형의 특성상 메밀, 고구마, 감자, 당근 같은 구황작물을 삶아서 ‘범벅’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발달했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걷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발로 땅을 밟아서 이동한다. 그는 나귀를 타지도 않고, 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자동차를 타지도 않고, 오로지 두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고 이주하면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간다. 사랑도, 욕망도, 사람의 생애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피고 진다. 메밀꽃이 피는 10월 초입의 제주 땅은 온통 하얀 별꽃 천지다.

그 땅에서 제주 사람들은 차례상에 메밀로 만든 빙떡이나 보리와 막걸리로 만든 상애떡을 올리다가 1982년 밀 수입이 자유화되기 시작하면서 밀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섬으로 쌀과 밀이 유입되면서 그것으로 송편과 빵을 만들었다. 송편은 육지 사람들이 먹는 반달형이 아닌, 크고 둥글면서 가운데가 한라산 백록담처럼 움푹 들어간 모양이다. 카스텔라는 A4 사이즈로 큼직하게 만들어서 떡과 함께 차례상에 올렸다.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평소에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에 넉넉히 만들어 이웃들과 나눠 먹기 위함이었다.

빵보다는 밥이 최고라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제주 사람들을 보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나는 10여 년 전에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의 바게트의 위력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2011년,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7시에 빵집에서 갓 나온 따뜻한 바게트를 사 먹었다. 1유로 남짓한 가격이었다, 그 낯선 땅에서 먹을 수 있던 가장 저렴하고 맛있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여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식비를 절약하느라 값싼 바게트로 연명하던 시기였는데, 바게트는 나를 배고픔에서 구출해 주었고, 덕분에 그 시절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바게트의 맛. 구수하면서 오로지 소금과 밀과 발효된 맛으로 오묘하고 담백한 쌀밥의 맛을 내던 바게트.

나는 카스텔라에서 그 바게트를 본다. 카스텔라에는 단순한 재료에서 최고의 맛을 뽑아내는 지혜가 스며들었다. 달걀을 깨뜨려 노른자를 흰자와 분리해서 박력분과 설탕을 넣어 달콤한 반죽을 만든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환해지는 카스텔라의 보름달 같은 색깔은 이 달콤한 반죽에서 나온다. 흰자로는 설탕을 부어가며 머랭을 만든다. 카스텔라 특유의 폭신폭신하고 촉촉하게 감싸는 식감은 이 머랭을 거품기로 치대는 정성에서 나온다. 요즘은 손으로 치댈 필요 없이 핸드믹서가 나오기는 하지만, 손으로 치대고 또 치대면서 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머랭을 보게 된다. 부풀어 오를수록 우리의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일반 반죽보다는 걸쭉한 질감의 이 반죽은 오븐 속에서 다시 한번 부풀어 오른다. 제빵사는 이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줄 양식이 되기를 바란다.

반죽은 오븐의 열기 속에서 익어간다. 그 열기를 빵은 간직하고 있다. 그 온기를 간직한 빵의 섬유질을 섭취한 우리들은 그날의 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빵을 조상을 기리는 은덕의 상에 올린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길목에서 빵은 더 이상 육체를 배 불리는 음식이 아니라, 저세상에 살고 있는 영혼들의 음식이 된다. 음식이 육체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손길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매일 아침 새로운 반찬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준비하는 갈빗집 주방장의 손길과 그 갈비를 구워서 가위로 썰어주는 알바생의 손길과 그 불판을 닦아내는 사람의 손길이 있다. 그 고깃점을 먹고 양껏 배부른 우리들의 영혼은 모두 누군가의 손길과 동물의 살점으로 채워졌다. 추석 명절이면 여전히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는 여인들이 있다. 우리는 기름진 전을 먹으면서 마음도 육체도 배 불린다. 누군가의 피, 땀, 노고가 들어간 음식을 먹기에 우리 영혼에 기름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음식이 저세상의 영혼을 위한 음식이 될 때, 우리는 음식이 더 이상 육체가 아닌 생과 사의 영역을 넘나들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을 본다. 우리가 동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도 한 것은 여기에 있다. 음식을 내 배만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단. 거기에 가장 인간적인 의지가 작동한다. 이 땅에 살아 있지 않은 영혼들의 배를 불리고, 내 땅에 살지 않고 있는 다른 인간들의 배를 불리겠다는 의지는 우리가 음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의지다. 나는 여기서 종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재료가 나를 살리고, 다른 생명체를 살리며, 신들을 위한 음식이 될 때 우리는 먹고 배설하는 짐승에서 나누고 베푸는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김밥과 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