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귀한 것들은 시간의 삭풍에 기어이 휘발되고 만다. 사랑, 연민, 염려, 배려, 사려 같은 것들...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낯선 이의 팔을 붙든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 버스가 덜컹대어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갈 때마다 그녀의 얼굴 근육에는 긴장감이 서린다. 행여 저 사람이 넘어질까 조마조마하다. 그녀는 얼굴이 아주 자그마하지만, 작은 돌같이 단단하다. 제주의 검은 돌들은 구멍이 숭숭 나 있어 바람이 그 틈을 통과한다. 바람이 그들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그녀의 삶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시간의 삭풍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를 간신히 붙든 채, 그녀는 자신의 휘발된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 속에 끝내 놓지 못하는 그 사람을 김 서린 창을 닦아내듯 선명히 보려고 안간힘 쓰고 있을까.
할머니는 이제 여기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할 때, 한라산 동굴에 숨어 들어간 어멍(어머니), 아방(아버지), 노인들과 이웃 삼춘들을 말이다. 군경들 눈을 피해 어멍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와 산 공기를 쐬러 나온 달밤을, 아이였던 그녀는 기억할지도 모른다. 76년간 간직한 그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를. 동굴의 깊은 어둠과 탁한 공기 속에서 나와 한라산 바람의 숨결에 깊은숨을 내뱉던 어머니의 얼굴을, 그녀는 기억할지도 모른다.
“밭에서 일할 땐 이 보름이 경 야속핸게마는, 이디 이 보름 맞으난 시—원한걸.”*
(밭에서 일할 땐 이 바람이 그리 야속하다마는, 이렇게 바람을 맞으니 시원하다)
아버지가 선득한 바람을 맞으며 불에 탄 집터에서 건져온 감자 한 알을 그녀는 기억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과 맞바꾼 감자 한 알의 온기로, 어린 그녀와 어머니, 삼춘들이 허기를 달랬다. 그때 산속의 바람이 그들의 허기 속으로 파고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끝 모를 허기의 바람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은 이 허기의 바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섬에 부는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바람은 제주 사람들의 한숨이자, 탄식이자, 손길인 것이다. 그 아픔에서 비롯한 숨결이 나의 피부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할머니, 저 내릴게요.”
내릴 때가 다되어 나는 할머니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주말로 인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미소랄지, 무구함일지 모를 표정으로 나의 팔에 주었던 힘을 풀고 놓아주었다. 나는 그녀의 조약돌 같은 침묵을 고이 받아 들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돌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올려둔다. 돌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고, 햇빛의 미열이 스며 있다. 이 온기는 우정일까, 선의일까, 아픔일까. 통증으로 발열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 때때로 돌은 시퍼런 바다의 숨결과 파도 소리를 기억한다. 그 파도에 휩쓸려간 누군가의 뼈와 살을 기억한다. 그 뼈와 살이 흘러 들어갔다던 쓰시마섬까지 돌의 시선이 닿는다. 그 돌의 시선을 따라, 내 곁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가만히 그 돌을 바라본다.
* 영화 <지슬>(2013) 속 대사를 인용했다.
** 이종형, <바람의 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