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의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살아 있음이 누군가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음을 매 순간 자각하는 일이다.
유족遺族: 죽은 사람의 남은 가족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때때로 이 유족이란 말은 낙인처럼 기능하기도 한다. 불행의 낙인 같은 것. 아무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들의 상서롭지 못한 기운. 사람들이 꺼리고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나와는 무관한, 실체를 알고 싶지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낙인의 단어. 이 한 몸으로 살아가기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왜 다른 유족이 겪은 일을 알아야 할까, 나는 생각해 본다. 각자도생의 논리가 만연한 시대에 다른 이의 불행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걸 펼치고 싶지 않다. 어떤 호기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85쪽
소설 속 경하는 4.3 유족인 인선을 만나면서 그들이 겪어온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기까지 수많은 장애물을 마주한다. 사건에 대한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악몽을 꾸고, 두통과 위경련에 시달린다. 병원에 입원한 인선이 키우던 새를 살리기 위해 경하는 폭설이 내린 제주 중산간 마을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친다. 마치 순례자의 길처럼 길고 지난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사랑하지도 않는 존재를 왜 내가 구해야 해.’
더군다나 그 존재가 사람도 아니고 새인 경우 심리적 저항감은 더 거세진다. 간신히 인선의 집에 당도했을 때, 새는 이미 죽어 있다. 경하는 인선을 ‘대신’하여 그 새를 묻어준다. 이 모든 과정은 일련의 ‘바통 터치’처럼 보인다. 우리의 전 세대가 겪어온 역사의 트라우마를 다음 세대가 받아 들고, 그 세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음 타자가 (유족이 아님에도) ‘대신’ 넘겨받는다. 그렇게 트라우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건너 전해진다.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촛불의 음영처럼 우리 주변을 배회하며 술렁인다.
이렇게 누군가를 ‘대신’하는 것. 나의 몸을 타자에게 넘겨주는 일. 거기에는 크나큰 고통이 따른다. 이런 것을 이타적 행위라고 할 수만은 없다. 소설 속 경하가 말하듯 어쩔 수 없이 그 일이 자신의 의식과 육체 속으로 밀물처럼 잠식해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경하가 겪는 이 모든 과정이 ‘자아’에서 ‘타자’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경하는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쓰던 작가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가족과 이별하고, 세상을 하직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슬픔에 잠식되기 전에 타자의 슬픔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의지와 자각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살라’고 하는 존재의 명령이 그녀에게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내가 왜 복종해야 해.’
이런 의문이 들 때, 누구로부터의 명령이고 누구로부터의 복종인지 모르는 채, 그 의문이 가리키는 눈보라의 심연 속으로 그녀는 허우적대며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삶의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우리네가 그러하듯, 그녀의 발걸음은 필연적으로 ‘사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서.
그녀가 나에게 초를 넘겨주었다. 초를 받아 든 내가 빛을 비추는 동안 그녀는 쪼그려 앉아 작업화를 신었다. 일어선 그녀에게 나는 초를 넘겨주었다. 손발이 맞는 자매처럼, 내가 운동화를 신는 동안 그녀는 불빛을 비춰주며 서 있었다.
- 같은 책, 303쪽
촛불을 넘겨주고, 넘겨받고 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누구의 생명인 듯 타오르는 그 촛불을 누군가는 들고 있어야 한다. 그 불빛을 받아서 또 다른 누군가를 비춰주어야 한다. 어둠이 우리를 잠식하기 전에 심연 속에서 기어이 불을 켜고 말겠다는 마음. 그 불빛으로 누군가를 비춰주겠다는 마음, 어둠 속에 연대하는 그 마음이 바로 유족의 마음이다. 누군가가 켜둔 그 촛불을 받아 든 순간, 그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유족이 되는 셈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자의 슬픔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 체화가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야말로 ‘지극한 사랑의 길’인 것이다.
기어이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 돌아가 껴안겠다는 마음, 마음속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겠다는 마음. 내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당신의 피를 돌게 하겠다는 그 마음,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 당신을 붙들겠다는 그 마음, 존재하지 않는 당신을 존재하게 만들겠다는 그 실천의 길.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껴안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마음속에 불씨 없이 우리는 방향을 잃은 짐승의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타자의 죽음을 기억함 없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러므로 기억하는 것은 사랑의 간절한 기도이며 살아감의 미래인 것이다.
때마침, 이곳 제주에는 올해 첫눈이 내렸다. 눈인지, 비인지 모르게 진눈깨비는 바람에 휩쓸려 사선으로 내리면서 지상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오름은 지상에 웅크린 짐승 같다. 그 짐승의 둥그런 등과 같은 능선이 눈바람에 희뿌옇게 보인다. 이 추위가 가혹해지면 가혹해질수록 저 오름은 더욱 악착같이 지상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기어이 살아야겠다며, 이 삶이 두 번째 삶이라며, 눈과 바람에도 지지 않고 지상을 끌어안으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유족에 대한 정의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 이름은 불행의 낙인이 아닌, ‘사랑’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발견이어야 할 것이다. 무정한 세상에서 삶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의 이름, 누군가의 목숨을 대신하여 두 번째 삶을 사는 자들의 이름, 기억함으로써 사랑의 현존을 실천하는 자들의 이름, 그들은 유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