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기부캠페인은 왜 피곤해질까

동정심은 기부를 시작하게 하지만, 정체성은 기부를 남긴다

by soymilk

오랜만에 동네 에스프레소 바에 들렀다가 놀랐다.

에스프레소만 주 메뉴로 두고 오후 3시쯤 닫던 곳이었는데, 매장 인테리어도 크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메뉴판에는 크로플과 샌드위치, 감자스프가 함께 적혀 있었다. (영업시간은 밤 10시까지로 바뀌어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나?’라는 생각이 스쳤고, 곧 다른 질문이 따라왔다.

한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상품과 가게가, 언제부터 더 많은 것을 포함해야만 하게 되었을까.

그러다 알아차렸다.

이건 커피의 문제가 아니라, 상품이 시장에서 겪는 아주 흔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혁신은 시장을 바꾸고, 어떤 혁신은 소모된다.
기능만 남은 상품은 빠르게 복제되고, 복제된 상품은 결국 값으로만 경쟁하게 된다.
경영에서는 이 과정을 ‘commoditiz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변화는 커피 업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는 충분했던 단일한 가치가, 시장에 너무 많이 복제되는 순간부터 ‘설명’을 요구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구조는 의외로 기부 상품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

문득, 비영리 영역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 떠올랐다.

“요즘 기부 캠페인은 왜 이렇게 비슷해졌을까?”

커피처럼, 기부도 이제는 ‘의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단계에 들어온 건 아닐까.


연말이면 으레 그러하듯

다양한 기부캠페인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 반지나 팔찌, 인형 같은 굿즈를 제공하는 걸 제외하면

비슷해보여 피로하다 못해 거부감이 들 지경이다. (조금 솔직해지자)


기부는 끊기 어렵고, 보여주기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상품이다.

지금 대부분의 정기후원 상품은

‘도덕적 압박이 있는 소모품형 상품’이다.

시작할 때 가장 기분이 좋고, 시간이 갈수록 기부금은 쌓이지만

경험은 쌓이지 않는다.

돈은 입장권이고, 핵심은 그 이후의 참여 경험인데

내가 무엇에 참여했는지 (빈곤 퇴치, 식수 사업 개선, 결식아동 돕기 등) 잘 보이지 않는다.

기부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질 수 있다면...


상품이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태도와 정체성을 산다.
이 지점에서 기부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기부는 과연 여전히 ‘선의’로만 선택되는 상품일까, 아니면 이미 하나의 luxury good이 되어가고 있을까.


지속이 가능한 쪽은 ‘정체성·참여 구조를 가진 인프라형 기부’다.

기부를 함으로써 어떤 소속의 멤버십이 주어지고

기부를 했다는 사실여부보다 어떤 문제의 해결사로 참여했다는 메시지가 더 주목받고

기부 히스토리가 개인의 가치 이력서, 즉 정체성이 된다면

개인의 선택을 자랑하게 하는 luxury goods로써의 포지셔닝도 가능할 것 같다.


가치 기반, 경험 기반의 소비가 더욱 확장하는 시대에

지속 가능한 기부를 위한 캠페인, 길은 무엇이 있을까

그 길을 위해 누군가가 어떤 일들을 해나갈까

응원하고 관찰하게 된다.



최근 정기후원을 하나 해지했다.

10년 가까이 후원하던 아이가 타 지역으로 이사간다는 메시지를 받고

후원을 종료하고 싶다는 전화를 직접 걸기까지는 마음을 세게 먹어야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 선택이 나에게는 오히려 기부를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10년이면 그래도 많이 한 거 아닌가 싶어서 죄책감은 갖지 않기로 했다)


멤버십과 구독이 넘쳐나는 시대에 작은 돈은 없다.

아무리 선의를 갖고 쓰는 돈일지언정, 어떤 기부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부는 멈추는 순간보다, 이유 없이 지속될 때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소비자가 상품을 다시 선택하듯,

기부자 역시 자신이 참여하는 구조를 이해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쩌면 단순한 동정심, 굿즈로 기부를 시작했더라도

'생각하는 기부자'들이 모여 기부 패러다임을 바꿔나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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