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나만의 초콜릿 박스를 채우는 일

by 뾰로롱STella

취미 = 취향 가득한 나의 초콜릿

사람들은 종종 내가 취미 부자, 심지어 취미로만 살아가는 사람처럼 여기곤 한다. “뭘 그렇게 많이 하세요?”, “그렇게 살 수 있다니 정말 부러워요.” 때로는 진심 어린 감탄이지만, 그 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시선, 이를테면 ‘한가한 소리’라는 핀잔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번에 여러 취미에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리듬과 템포를 유지하고, 쉽게 활기를 잃지 않기 위해, 마치 길이나 특성이 다른 여러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듯 다양한 취미들을 삶 속에서 조화롭게 선택하고 활용하며 살아간다.


나에게 취미는 마치 초콜릿 박스와 같다. 우리는 초콜릿을 한 번에 전부 먹어치우지 않고 그날의 기분이나 당기는 맛에 따라 하나씩 골라 먹듯이, 나에게 취미도 그렇다. 내 초콜릿 박스는 제법 다채로운 구성을 자랑한다. 어떤 날은 견과류가 콕콕 박힌 쌉쌀한 다크 초콜릿처럼 깊고 묵직한 취미를 꺼내 음미하고, 또 어떤 날은

잠깐의 달콤함을 선사하는 가벼운 초콜릿, 혹은 특정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초콜릿, 별다른 준비 없이도 바로 즐길 수 있는 쫀득한 취미를 선택한다. 그것은 마치 힘든 하루 끝에 두통을 줄여주 는 타이레놀 대신 꺼내 먹는 나만의 금쪽이 처방전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두세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조금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진 것뿐이다. 특별히 부럽거나 대단한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삶의 다가올 순간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내가 가진 유일한 취미가 격렬한 래프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물리적으로 래프팅을 즐기러 먼 곳까지 이동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유튜브에 ‘나중에 볼 영상’ 목록만 멍하니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시간이다. 바로 이럴 때, 나는 나의 초콜릿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어 그날의 기분, 주어진 상황, 그리고 남은 시간에 딱 맞는 초콜릿을 신중하게 고른다. 래프팅의 짜릿함 대신, 흥미로운 박람회에 잠시 들러 새로운 영감을 얻거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아 요가 수업에 참여하거나, 혹은 화실에 앉아 오롯이 나만의 색깔을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날의 ‘나’라는 미식가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초콜릿을 고르듯이, 그렇게 다양한 취미들을 삶 속에서 즐긴다.



일이 사라지자 내가 사라졌다

내가 취미를 하나둘씩 다시 모으기 시작한 것은 시간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였다.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는 극도의 불안감에 갇혀 자유롭지 못했던 시간. 서른 즈음, 나는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용감하게 박차고 나와 꿈에 그리던 여행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처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이전보다 훨씬 더 주체적인 ‘나’로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서비스 론칭을 불과 사흘 앞두고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파도가 덮쳐왔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간신히 2년을 버텨냈지만 결국 폐업이라는 쓰디쓴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그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몇 번이나 재창업을 시도했지만, 매번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며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다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려 애썼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소위 ‘고스펙’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냉담한 반응을 받거나, 창업 실패라는 뼈아픈 경험을 나의 소중한 커리어로 인정해주지 않는 냉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의 재기는 자꾸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속절없이 녹아 사라져 갔다. 그 누구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기에 시작했던 스타트업이었는데, 정작 폐업하고 나니 마치 나 자신이 무가치하게 낭비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나는 점점 세상과의 연결을 끊은 채 침묵 속에 잠겨 들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라는 고립된 공간 속에서 보냈다. 의미 없이 TV 화면만 멍하니 응시한 채, 하루 전체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무력한 날들이 속절없이 반복되었다. ‘일’이 전부였고, ‘일’이 곧 나라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일’이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사라졌을 때 찾아온 깊고 어두운 공허함. 일이 사라지자 나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졌고,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인간관계마저 덩달아 흩어져 버렸다. 대부분의 대화는 사업 관련 미팅이나 형식적인 업무 연락이 전부였고, 진심을 나누던 사적인 관계들은 하나둘씩 낯설게 멀어져 갔다.


나는 어린 시절 그 흔한 “심심해”라는 말조차 제대로 꺼내본 적이 없는, 혼자서도 잘 놀던 아이였는데.... 그런 내가 지금, 사무치게 너무나 심심하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것들, 나를 진심으로 기쁘게 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마치 머릿속의 블랙홀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듯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기력감에 갇힌 나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는 대체 뭘 좋아했더라?’ 잊고 지냈던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찾아내고, 용기를 내어 다시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 나를 붙들어준 것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우연히 추천해 준 요리 영상들이었다. 칼날이 도마 위를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는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신기하게도 맑게 정화시켜 주었고, 따뜻한 버터가 팬 위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황홀한 소리는 텅 빈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나에게 좋은 것, 따뜻한 것을 먹이고 나니 신기하게도 금세 마음속에 작은 용기가 샘솟아 칙칙한 방을 나섰다. 잊고 지냈던 화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붓을 다시 쥐어보기도 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해 배달 음식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기에, 동네 구석구석을 천천히 산책하며 부족한 운동량도 채우고, 소소한 용돈도 벌어볼 겸 하루 두 시간씩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 절망적인 시기의 나에게 취미는 단순한 여가 활동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곧 생존이었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어 매는 작고 낡은 구명줄이었고, 무기력한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지만 강력한 긍정의 도구였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그 암울했던 시간을 견뎌낸 이후부터, 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나만의 초콜릿 박스를 다양한 즐거움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돈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취미들, 약간의 투자를 통해 더욱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취미들,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취미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더욱 따뜻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들까지. 그렇게 다채로운 맛과 향을 지닌 취미 초콜릿들을 내 마음의 상자 안에 조금씩 조심스럽게 담아왔다.


삶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엉키고 설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그 초콜릿 박스를 꺼내 든다. 그 안의 작은 즐거움들이 당장의 심각한 고민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잠시나마 굳어버린 감정을 부드럽게 녹여내고 다시금 힘든 현실에 꿋꿋이 맞설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선물해 준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당장

이라도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조차, 손안에 쥐어진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 덕분에 간신히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다시 다독일 수 있는 위안을 얻는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초콜릿상자와 같다.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포레스트는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던 아이였지만,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그저 눈앞의 일에 충실했을 뿐인데, 인생은 그에게 아주 다양한 초콜릿을 건넸다.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릿 상자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우리의 고단한 하루하루를 지탱해 주는 작은 위로는, 뜻밖의 순간에 소소한 취미가 가져다주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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