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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비얀코 Jul 28. 2022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15

창세기

엄마가 갑상샘 항진증 진단을 받으셨다. 아버지가 봄에 컨디션 난조를 보이시자 몇 달을 매달려 간호를 하시고, 4차 백신 접종까지 받으신 후 지치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연수를 받게 되어 미국에 2주간 다녀와야 하는데,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급한 마음 내려놓으시고 뭐든 천천히 하세요." 


"이 상황에서 느리게 해서 살아지니 어디?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조심할 거야."


출발하기 전,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어떤 책을 읽어드리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손주들이 다 잘 되는 것 이상 좋은 게 어디 있냐'라고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구약성경 창세기 속 아브라함! 별처럼 많은 후손과, 땅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받은 그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영감을 주지 않을까? 


미국 버클리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사촌동생의 집에서 지내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국계 이민 2세인 사촌동생과 대만, 일본의 혈통을 가진 역시 이민 2세대인 제부의 집 거실과 서재에는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양가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의 사진과 물려받은 유품들이 여럿 진열되어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다양한 민족의 이민으로 만들어진 국가이다 보니, 미국인들에게는 자신의 뿌리, 정체성이란 주제가 매우 중요한 듯하다. 지금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파친코'라는 소설도, 윤여정 배우에게 아카데미 상을 타게 해 준 영화 '미나리'도, 이민 2세대인 작가가 자신의 할머니 세대가 겪은 역사 속 수난 가운데 만들어진 '정체성 찾기의 이야기들'이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해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로 끝나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글귀가 가지런한 글씨체로 쓰여있었다. 


엄마 결혼식 전날,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단다.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 이렇게 세부류의 사람이 있다. 너는 시집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할아버지의 주문대로 엄마는 우리 집안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서 지난 52년을 살아왔다.  


액자 모서리에 붙어있는 빛바랜 사진 속 할아버지 얼굴을 뵈니 왠지 모르게 기도가 흘러나왔다. 


"엄마 고생 좀 그만하게 해 주세요...."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해, 친정에 들렀다. 엄마가 어떠신지 계속 맘에 걸렸다. 


"그래서 이젠 내 힘으로 안되니 하나님 알아서 해달라고 기도한단다." 


다시 컨디션이 회복되신 아버지께서 이것도 먹고 싶다, 저것도 해와라 주문이 많으시단다. "어젯밤에도 똥 기저귀를 여덟 번이나 갈았어." 


" 다 이유가 있겠지.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살려둔 거겠지. 어쩌겠니? 주어진 거니 또 감당을 해야지."


"너 읽어주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참 좋더라. 엊그제 보낸 거는 들으면서 얘가 왜 이렇게 잘하지? 하고 놀랐어. 인물들의 목소리를 아주 잘 살리더라고. 난 요즘 스님 설법도, 신부님 강의 말고 네가 보내 준 걸 들어. 그걸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좋아. 내용은 둘째치고 딸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 좋아." 


손발 마사지를 해 드리니, 너 힘드니 하지 마라고 하시면서도 마시지 받으시는 얼굴이 행복하시다. 


"난 누구도 부러울 거 없어. 젊은 시절 일은 많이 했어도, 하고 싶은 일은 다 했고, 후회도 여한도 없어. 착한 아들 딸들 있고." 


엄마의 언어가 변했다. 예전엔 하나님이 어디 있냐며 화를 내시던 분이, 어느새부터인가 나는 제발 자는 듯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너네 하나님께 부탁 좀 하라고 하시더니, 이젠 밤새 똥 기저귀를 여덟 번 갈고서도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 힘든 와중에도 엄마의 마음이 바뀌어, 고난 자체보다 그 뒤에 숨겨진 더 큰 뜻을 생각하실 수 있다니.  막내딸을 아끼시고 대견해하시던 할아버지께서 내 기도에 힘을 보태주셨나? 


"세상에는 천사 같은 사람들도 많아. 성당 어떤 자매님은 지금까지 천명의 연도제를 지내줬다고 하고 또 어떤 자매님은 아침마다 나한테 이렇게 성경말씀을 보내준다. 벌써 몇 년째인지 몰라!"  


"엄마, 엄마가 바로 천사야! 그 오랜 세월을 사랑 때문에 자기를 내려놓은. 엄마가 바로 예수야! 


"천사는 무슨. 너 가는 길에 나도 수영장이나 가야겠다. 난 수영을 해야 몸이 안 아파." 


애초 기대와 다르게 아버지는 '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재미없다'며 녹음 파일을 안 들으신단다. 잠시 허탈하긴 했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했으니, 거기에도 또한 뜻이 있겠지 믿는다. 


다시 아버지 좋아하시는 축구의 힘을 좀 빌려야 하나보다. 예전에 사둔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 선수 책을 뒤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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