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케이크와 리키
"토요일이다! 일어나!!"
그랬다. 그때의 나는 토요일만 되면 벌떡 일어나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절친 리키를 깨웠다. 리키는 고등학교 때 만난 내 절친이자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다. 이 친구는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캐나다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지금은 캐나다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던 리키가 잠깐 한국에 들어와 우리 집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나의 소울 푸드는 바로 이 시절의 산물이다.
"나 빨리 팬케이크 만들어줘. 많이 해야 해, 알지?"
"야, 알았어. 우리가 언제는 적게 먹었냐? 배 터지는 게 우리 일상인데."
당시에는 부모님께서 두 분 다 토요일까지 출근을 하셨기 때문에 눈을 뜨면 집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평일보다 잠을 좀 더 자고 느긋하게 일어날 법도 했겠지만 우리들에게는 설레고 즐거운 '토요일 맞이 의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늦잠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잠보다 달콤했던 그것은 바로 팬케이크에 커피를 함께 먹으며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이 의식을 치러야만 토요일이 온 것 같았고 우리에게 토요일이란 둘만의 이 신성한 의식을 의미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우리는 세수할 시간도 아까워 양치질만 대충 하고 주방으로 돌진했다. 다른 음식들, 예를 들어 떡볶이나 김밥 등은 주로 내가 만들었지만 이상하게 팬케이크만은 리키가 만들어야 했다. 리키의 팬케이크는 내가 만든 두툼하고 기름진 팬케이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압도적인 맛을 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속하게 의식을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을 나누어 진행했다(사실 팬케이크를 빨리 먹고 싶었다). 리키는 얇지만 폭신했고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버리는 마법 같은 팬케이크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마치 기계나 되는 듯이 정확하게 같은 상태로 구워 냈고, 그동안 나는 버터를 자르고 커피를 탔다. 커피 역시 우리만의 매우 진한 일명 '스트롱기스트(strongest)' 커피여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임무는 팬케이크에 비하면 몹시 짧게 끝나는 것이었으니 할 일을 일찌감치 마친 나는 늘 식탁에 앉아서 빨리 만들어 달라고 리키를 보채곤 했다.
기다림에 지쳐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완성되어 예쁘게 포개져 접시 위에 올라오는 팬케이크. 그러나 이것이 끝이겠는가? 당연히 아니었다. 이것의 화룡정점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두툼한 버터와 시럽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내 몸의 반이 버터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적당하고 귀여운 버터조각은 나에게는 버터가 아니었다. 나는 조각이 아닌 덩어리를 취급하는 사람이었고(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의 토요 특식인 팬케이크에는 엄청난 양의 큼지막한 버터가 거의 빵이 안보일정도로 올려져 있었다. 가끔은 바나나나 블루베리, 크랜베리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주인공은 버터였다. 이렇게 버터를 올리고 나면 빵을 흠뻑 적실만큼 메이플 시럽을 들이부었다. 시럽은 역시 팬케이크계의 최고봉인 캐나다산 메이플 시럽이었다.
드디어 눈앞에 버터와 시럽, 베리로 완성된 거대한 팬케이크의 산과 커피가 놓인다. 의식을 위한 나름의 거한 준비가 끝이 났으니 즐길일만 남았다. 우리는 산처럼 쌓인 아름다운 팬케이크를 만족스럽게 양손에 받쳐 들고 의기양양하게 거실로 향했다. 음식이 완비되었으니 다음 의식이 진행되어야 했다. 영화를 고르는 일이었다. 좋은 영화가 빨리 발견되면 영화를 보며 팬케이크를 먹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일단 팬케이크부터 먹고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먹기도 바쁜데 입에서는 잠시도 말과 웃음이 끊기지 않았었다. 한 입 갖고 두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입 갖고 두 가지 동작은 수월하게 해냈다.
친구가 캐나다로 돌아가버린 후에도 나는 팬케이크를 좋아하고 즐겨 먹었지만 그때의 그 맛은 도저히 재현해 낼 수 없었다. 혼자서 먹든 다른 사람과 먹든 팬케이크를 먹을 때면 늘 리키가 생각나곤 했다.
리키의 팬케이크는 왜 그렇게도 맛이 있었을까? 그때는 리키가 기술이 좋아서라고 간단히 생각했었지만 지금 다시 찬찬히 되짚어보니 친구의 팬케이크가 그렇게나 맛이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팬케이크에 담긴 친구의 사랑 때문이었다. 황금 같은 토요일에 늦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애기같이 팬케이크 해달라고 보채는 철없는 친구를 위해 다리가 아프도록 오랫동안 서서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해 만들어주던 그 마음. 그 고운 마음이 담겨 있었으니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팬케이크가 탄생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리키와 나는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다. 세월이 흐르며 우리는 예전보다 더 깊고 단단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시차가 있어 통화는 자주 못해도 매일 생각하고 매일 염려하고 매일 의지하는 자매 같은 친구다.
팬케이크를 떠올리다 보니 리키와 보내던 그 토요일 아침이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의 떠들썩한 수다와 농담도 그립고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먹었던 팬케이크와 커피가 그립다. 그냥 그 시절 친구와 내가 함께한 모든 것들이 그립다. 친구가 한국에 없으니 이 그리움은 더욱 크고 간절하다. 언젠가 우리가 또다시 함께 토요일 맞이 의식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면 우리의 행복과 즐거움은 얼마나 큰 것이 되어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일렁거린다.
'친구는 우리의 가족을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리키와 친구가 된 것은 내가 살면서 했던 수많은 선택 중에서 드물게 잘 한 선택이었다.
지금은 새벽이라 곤히 자고 있을 내 친구. 나에게 소울 푸드를 만들어주었던 나의 소울 프렌드, 리키.
너의 잠이 너의 피곤을 씻어 주기를, 밝아오는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친구야.
보고 싶다, 내 친구 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