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 에세이스트 J Nov 15. 2024

허당이라 좋습니다

라라크루 9기 마지막 금요문장

● 금요일의 문장공부(2024.11.15.) 오늘의 문장 

구멍이 점점 뚜렷이 보인다면 환영할 일이야. 이제야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본다는 거니까. 이젠 받아들여. 네가 너의 구멍을, 네가 너를. 지금 너의 문제는 구멍이 났다는 게 아니라 구멍이 나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신은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구조로 인간을 설계하지 않았거든. 인간의 영혼은 벽돌담이 아니라 그물 같은 거야. 빈틈없이 쌓아 올려서 구멍이 생기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구멍이 나서 '무엇'이 새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야. 바로 그 '무엇'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그렇게 조금씩 영혼이 자라는 거지. 사람의 영혼은 자랄수록 단단해져. 구멍이 난 채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오히려 그 덕에 더 잘 살 수 있어. 정말이야. 믿어도 좋아.     ☞ 유선경, 『구멍 난 채로도 잘 살 수 있다』, 사랑의 도구들, 콘택트, 101쪽 


"넌 공부 빼고는 참 허당이야!"


내가 평생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들어온 말이다. 허당. 세 보이는 겉모습과 단호한 말투덕에 나는 항상 주변인들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살아왔다. 내가 무엇이든 야무지고 똑 부러지게 할 것이라는 오해말이다. 

이 오해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주변인들의 무턱대고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결국 나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지는 일이 왕왕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교사가 되면서 문서작업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나의 허당본질은 이 문서작업에서 아주 자주 찬란하게 등장하여 나를 비롯한 관련 부장님들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나는 나의 허당본질이 나의 단점이 될 뿐만 아니라 장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단점보다 많은 장점을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라고까지 인식하게 되면서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으나 스스로 나서 나의 허당본질을 재정의하게 되었다.    


<기존의 정의>

1. 국어사전(네이버) -  

* 허당 허사(). (명사) (같은 ),헛일(보람을 얻지 못하고 쓸데없이  노력).공사(), 도사(), 허사(), 헛것."도루묵"이라는 의미로도 쓰임.

진지하지 않고 철이 없는 사람을 나타낼 때 쓰이는 충청도 사투리.


2. 영어사전(네이버)

An overconfident and clumsy person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고 서툰 사람)

* goofball(멍청이), dorky(얼간이)


보시라. 허당은 원래 이렇게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듬뿍 담고 있는 단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 본다면 나는 정말 뭐든지 서투르고 잘 못하는 멍청이에 불과한 사람이겠다. 물론 여전히 나에게 이런 면이 없지는 않다. 문서작업에서부터 돈을 모으는 일, 부동산 같은 일에는 정말 완전한 허당이 분명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이것을 수용하면서 허당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재해석했다. 


<나의 정의>

*허당 - 나이에 갇히지 않고, 관습적 사고에 갇히지 않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한 자. 수시로 듣게 되는 철없다는 이야기를 칭찬으로 생각하는 자.


나의 이런 정의는 나라는 사람을 그대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살면서 내가 무수하게 일상적으로 들어왔던 타인으로부터의 평판과 스스로 내린 나의 특성을 모아보니, 나는 정말 내가 내린 정의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나의 정의에 의한다면 순도 100인 허당 그 자체였다. 


허당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나의 관점에서는 규율과 원칙에 한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정해진 룰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떤 조직에서도 원하게 되는 안전한 구성원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고, 틀대로 하지 않아 번거로움을 자처하는 사람이며, 관습적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여 눈치를 받는 사람이지만, 이것이 나이고 나는 나대로 존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허당이라면 나는 허당이다. 기꺼이 열렬하게 허당임을 공표하고 허당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구멍이 새로운 가능성으로의 창이 될 수 있다면, 나의 허당본질은 나에게 자유하는 삶을 허하는 단단한 발판이다. 나는 허당인 내가 좋다. 허당이라 더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야 말할 수 있는 거칠었던 그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