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1986)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를 떠나 살다가 우연한 계기로 오랜만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얼마 전인 듯 생생한 나의 기억과는 달리 나와 내 친구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우리의 걸음으로는 다 채울 수 없었던 그곳은 실망스럽게 작고 평범한 여느 동네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무서운 할머니가 살던 작은 집은 텃밭을 가진 그저 작은 집에 불과했고, 엄청난 위용으로 몹시도 위압적이었던 동네 제일의 부잣집은 부지런한 부부가 정원을 열심히 가꾸어 놓은 깔끔한 주택일 뿐이었습니다. 구석구석에서 어린 우리들의 주체 못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지금의 나보다 젊었을 우리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생생한 추억이 엄습하여 가슴 가득 아련함이 피어올라 한동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머무는 그곳과 어른인 내가 사는 이곳이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여러 개의 은하계를 사이에 둔 것 만큼이나 멀어져 있습니다. 그 시절 나와 꿈을 이야기하고, 책을 보며 토론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울고, 같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친구 역시 이제는 내 곁에 없죠. 그 시절의 친구들,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다 보니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때 꿈꾸었던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훌륭한 어른이 되자는 어린 날의 다짐을 떠올리자니, 훌륭한 것 같지도 않은 데 어른이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언제쯤이면 나는 내가 꿈꾸던 어른이 될 수 있는 건가. 될 수는 있는 건가. 돼야만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도대체 훌륭하다는 게 뭘까. 연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은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른은 마침표가 아니다. 어른도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그 성장의 끝에는 결국 스스로에 대한 만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어린이나 청년들이 주연을 하고 있는 대다수의 성장영화가 또래 관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른 관객들에게조차 고무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이처럼 성장이라는 과정이 전 연령에 공히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또한 요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리버 피닉스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어 더욱 감동을 주는 영화 <스탠바이 미>는 대표적인 성장영화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회상이 영화의 주가 되면서, 현재 성장 중인 어린 관객보다는, 성인으로서의 렌즈로 어린 시절을 투영하여 현재의 삶에 대한 가치를 재고해 볼 수 있는 어른 관객들에게 보다 큰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를 생각해보면 그 시절 우리가 마냥 걱정 없이 행복했던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성인인 지금보다 작고 단순한 세상에 속해 있다 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할 걱정의 성격 역시 작고 단순했을 뿐이죠. 또한 어린 시절에는 대다수의 우리의 선택에 부모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대부분의 우리의 실수와 잘못 역시 부모가 무마해주곤 했습니다. 결국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의 무게와 근심은 그들에게 넘기고, 우리는 그저 '어린이'만 하면 되는 그런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의 울타리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 시기에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평범하지 않은, 아니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됨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탄하지만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부모와 어른들이 되어주지 못한 울타리의 역할을 서로에게 내어주었던 네 아이들의 하룻밤 모험을 그린 작품이 바로 영화, "스탠 바이 미"입니다.
이 영화는 1986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입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어 퓨 굿 맨, 미저리 등을 제작한 롭 라이너 감독님이 감독을 맡았고, 현재까지 활발히 배우로 활동 중인 제리 오코널, 키퍼 서덜랜드, 그리고 존 쿠삭 등이 앳된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3년에 2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리버 피닉스의 어린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스탠 바이 미는 성장영화의 고전으로 불릴 만큼 전형적인 성장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들을 성장영화라고 부르는 걸까요. 성장영화란 일반적으로 아이들(청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특정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성숙해져 가는 과정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는 영화를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스탠바이 미는 완벽하게 성장영화의 공식을 가지고 있다고 거론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장영화들은 크게 세 가지 서사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이 영화처럼,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성숙과 성장의 과정 자체에 집중한 영화 두 번째, 태양의 제국이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처럼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의 세상을 바라보며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꼬마 니콜라와 같은 영화처럼 아이들의 순수한 세상에 관객이 빠져들어 힐링을 얻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런 분류로 볼 때 스탠 바이 미는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의 성장의 과정이 우리의 성장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을까요?
영화는 한 남자가 세워진 차 안에서 신문에 난 변호사의 사망기사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장면은 이윽고 남자의 회상으로 바뀌며 1959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어느 여름, 4명의 소년이 트리하우스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워대고, 어른들이 쓰는 상스러운 농담과 욕설을 해가며 노는 모습에서 이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나 얼마 전 사고로 사망한 형 때문에 부모의 무관심과 냉대를 받고 있는 고디, 술주정뱅이에, 좋지 못한 행실로 유명한 아빠 덕분에, 나쁜 일에는 늘 근거 없이 의심받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크리스, 노르망디 작전 참전 후 정신질환을 겪는 아빠의 영향으로 늘 충동적인 테디, 뚱뚱하고 다소 둔하지만 밝고 낙천적인 번. 이 네 아이는 우연히 알게 된 기찻길 옆 어린아이의 시체를 찾아, 유명해질 목적으로 30킬로나 떨어진 철길을 걸어가는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네 명 모두 각자의 불행한 삶을 뒤로하고 12살에게는 험난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마침내 시체를 찾아냈지만, 웬일인지 아이들은 시체를 남겨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하룻밤의 여행은 어제 떠났던 마을을 작아 보이도록 만들었고, 크리스와 고디에게는 마을을 떠나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돼주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자신의 바람대로 작가가 된 고디는 변호사가 된 크리스의 사망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게 되었고 그 기사로 인해, 현재의 자신이 있을 수 있도록 용기와 격려를 해주었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와 함께 했던 그 하룻밤의 여정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 여정을 글로 옮기며, 다시는 12살 때의 친구들처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없을 거란 고디의 글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 유명한 스탠 바이 미 음악이 흐르면서 말이죠.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마을은 아이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동네에서 말썽만 피우는 마을 형들도 주인공들과 비슷한 삶을 살면서 자랐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도, 성장의 계기는 찾아옵니다. 시체찾기 여행이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예고치 않게 찾아왔죠. 아이들은 여행이 끝나고도 자신들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헤어지지만,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작아 보였다는 고디의 나레이션을 통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암시를 전해줍니다.
어른의 성장에 필요한 첫 번째 메시지: 내가 속한 환경이 나의 모든 운명과 인생을 단정 짓게 할 수 없다
한편, 크리스와 고디와는 다르게 나머지 두 인물, 테디와 번의 이후의 삶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시체찾는 모험이라는 같은 사건을 공유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성장을 가능케 하는 동력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성장을 이뤄낸 고디와 크리스를 따라가 보며 성장에 결정적 동력원이 된 요소들 세 가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결핍의 인지입니다. 고디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꿈이 있지만 형의 죽음 이후 그 꿈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맙니다. 크리스 역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자신의 집안사람들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전제로 자신에 대한 절대적 선입견을 지닌 마을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모험의 과정에서 두 아이가 자신들의 상처를 서로에게 보이고, 다독이며 흘리는 눈물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목표에 대한 인지, 그것을 이뤄내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적 난관으로 인한 좌절과 포기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삶, 그 결핍이 야기한 눈물이었죠. 이들은 삶에서의 결핍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그것을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기에,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동력원은 결정적 사건입니다. 아이들에게 시체를 찾으러 가는 여행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사건으로 작용합니다. 부모님과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 마을에서만 지냈다면 알 수 없었을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평상 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세상이 두려워 숨거나 비굴하게 회피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죠. 자신의 바닥을 자신의 발로 디뎌본 자만이 비상을 위해 얼마나 높게 날아올라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바닥은 비상을 위한 시작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장에 필요한 동력원은 그 결정적 사건을 함께하는 조력자입니다. 독일계 프랑스 신학자이며 사상가였지만 박애주의적 의사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는 "우리 내면의 불꽃이 꺼질 때 그 불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는 건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이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혼자였다면 자괴감에 빠져, 지방의 작은 마을이 갖는 삶의 패턴에 함몰되었을 수도 있었던 고디와 크리스였죠. 각각으로 존재할 때 그들은 그저 길바닥에 나뒹구는 흔한 돌멩이와 폐차 부스러기 같은 쓸모없는 쇳조각에 불과했지만, 둘이 한지점에서 마음을 모아 만나는 순간,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Flint and Steel, 즉 부싯돌과 철편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쓸모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군가에게 당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고디와 크리스처럼 말이죠.
어른의 성장에 필요한 두 번째 메시지: 결핍의 인지와 결정적 사건, 그리고 사건을 함께하는 조력자.
영화는 어른이 된 고디의 회상의 내용을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원하던 작가의 꿈을 이룬 고디가 크리스의 죽음을 접하고 어쩌면, 자신의 현재를 가능하게 해 준 30년 전 세 친구들과 겪었던 단 하룻밤의 사건이 주가 되고 있죠. 영화의 내용만으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고디의 삶이나 현재 중년이 된 고디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밖에서 같이 놀자는 아이들의 청을 들어주러 나가는 고디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해 고디가 느끼는 바를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지금의 내가 속한 평범하고, 어쩌면 가끔은 지루한 현재가 과거에는 그토록 염원했던 미래라는 것. 크리스와 같은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가질 수도 없는 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일생에 단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깨달음 말이죠. 그러나, 수많은 곳에서 수 만 번은 회자되어 결국 진부함을 갖게 된 깨달음일 망정, 저 말이 담고 있는 절박함과 무시무시한 현실성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18년 타계하신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유고작 '아침의 피아노'에서 김진영 선생은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겠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엽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삶의 어느 단계에서나, 그 순간에 머무는 그 즉시,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한 시점에 대한 포기와 폄하는 남은 두 개의 다른 시점에 대한 포기와 폄하 역시 되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나는 아이인 시절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매들렌 렝글의 소설 ‘시간의 주름’에서 처럼 시간에 주름이 있어 아이였던 나를 어른인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대다수의 우리는 아이 시절의 순수함을 잊고 사는 지금의 내 모습에 씁쓸함을 갖기도 하겠지만 혹여나 지금의 내 안에 놀랍도록 변하지 않은 아이 시절의 꿈과 이상이 그대로 담겨있음에 놀라는 일은 없을까요?
어른인 우리는 어른으로 도달하는 여정에서 겪은 온갖 경험과 기억이 "지금까지" 축적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한 우리의 성장의 여정은 계속되겠죠. 마침내 여정의 끝에서 뒤를 돌아보는 날, 아쉬움보단 빙그레 미소 지을 수 있는 나를 그려보면서 말이죠. 운이 좋다면, 고디가 그랬듯 어깨 걸고 함께 걸어줄 크리스 같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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