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독은 외롭지 않아... 네가 있으니

테스와 보낸 여름(2019)

by 무비 에세이스트 J

1991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마이걸”을 아시나요?

영화를 모르더라도 동명의 타이틀곡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마이걸이란 이름은 영화로든, 노래로든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어느덧 30년 전 영화가 되어버린 마이걸은 어린이들이 주연인 성장영화 답지 않게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로, 막연하게 죽음을 두려워하던 주인공 소녀 베이다가 실제로 친구의 죽음을 겪은 후, 그것을 계기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영화였습니다. 지하실을 작업실로 사용하던 장의사 아빠 덕분에 늘 죽음과 함께하는 환경에서 자라나야 했던 베이다는 항상 자신의 몸 어딘가에 병이 들었을 거라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의 어른들에게 이런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지만, 막상 그녀의 말에 어른들은 습관적으로 즉, 어린아이를 얼를 때 쓰는 상투적인 반응으로 일관했었죠. 베이다의 말과 행동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017년에 개봉되었던 “프리다의 그 해 여름”역시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6살 소녀 프리다가 낯선 환경에서 외삼촌 가족과 살게 되며 겪게 되는 소외와 외로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6살 아이의 표현되지 않는 외로움과 상실감은 주변 어른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프리다의 할머니나 이모들은 그저 인형이나 새로운 잠옷만으로도 “어린아이니까”, 어리니까 쉽게 부모의 죽음 정도는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니까"라는 시선은 어린아이들의 고민과 고통을 어른의 시선 밑으로 가두어, 그들이 온당히 받아야 하는 모든 관심을 차단해 버립니다.




테스와 보낸 여름은 2019년에 개봉하였고 한국에는 2020년에 개봉한 네덜란드 영화입니다. 아동문학작가로 널리 알려진 안나 왈츠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삼아 탄탄한 기본 줄거리를 지녔으며, 두 주인공이 지닌 각자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영화의 진행구조가 마치 미스터리 영화같은 몰입감을 부여함으로써 이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스티븐 가우터루드 감독은 1984년생 네덜란드 감독으로 2007년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2013년 Anything Goes라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어린이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번 작품 테스와 보낸 여름은 그가 만든 최초의 장편영화로 유럽과 북미의 각종 영화제에서 16번의 수상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장편 영화감독의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테스역의 조세핀, 샘역의 소니 코프스

샘역의 소니 코프스 판 우테렌과 테스역의 조세핀 아렌센은 이 영화 이전에는 연극과 뮤지컬, TV시리즈에서 연기실력을 쌓다가 이번 작품에 출연하게 된 네덜란드의 배우들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누구나 가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촬영지는 네덜란드의 테르스힐링섬으로 섬의 많은 곳이 자연보호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곳이어서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많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라고 합니다. 실제 섬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붐비는 시즌에 영화를 촬영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어려웠던 만큼 생생하게 휴가 분위기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특히나 샘과 가족들이 즐겨먹었던 생선 튀김의 맛이 몹시 궁금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영화는 가족과 함께 일주일간 섬으로 휴가를 온 특이한 소년 샘과, 그 섬에 살고 있는 유별난 소녀 테스가 만나, 함께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죽고 난 후 혼자 남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외로움 적응훈련을 하는 샘과, 어느 날 우연히 아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자신이 사는 섬으로 아빠를 초대하여, 그를 만나 친해지고 싶어 나름 치밀하게 준비하는 테스. 이 두 아이는 마음을 열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둘만이 가진 남다른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됩니다. 끝에 가서는 이성으로써 특별한 친밀감을 갖게 되죠. 아름다운 섬에서 자유롭게 고민하고, 어려움에 도전하고, 결국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여름을 즐기는 샘과 테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행복한 기운을 전달받는 영화입니다.




어린이는 고민이 어린 사람이 아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성숙을 위해 "성장을 하고 있다, 성장 중이다"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이 겪는 이런 진행중인 과정에 대한 고려 없이 10대들을 단순하고 확고부동하게 미성숙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아이라는 시기를 성숙을 향해 진행 중인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층적이고 한시적인 정체현상으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정확하지도, 적합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그들의 미성숙이 갖는 유동성이야말로 그들이 갖는 잠재적 성숙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샘이나 테스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무겁지 않게 담아내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실은 그들의 고민과 이슈들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들이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 당신은 몇 살 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최초로 인식하고, 체감했었나요? 정확한 나이까지는 생각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나 역시 죽는다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을 깨달았던 그 순간, 서늘한 공포가 가슴을 짓누르며 심장을 모조리 차지하고 앉아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순간, 어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치 가위에 눌렸을 때 그러하듯, 그저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이 생생한 생각들, 나의 살갗, 나의 이 팔딱 거리는 심장이 어느 순간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어린아이뿐 아니라, 나이를 먹으며 여러 번 상실의 고통을 겪어낸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입니다. 그러니 롤랑 바르트 같은 세계적인 철학자조차, 어머니의 죽음 이후 써내려 갔던 ‘애도일기’에 자신의 바뀐 일상에 상수가 되어버린 고독감에 대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독 혹은 외로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보편적인 인간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샘의 고민은 신기하게도 죽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이후의 삶에 있었습니다.

가족의 막내로서 모두들 먼저 죽고 자신만 남게 되었을 경우, 자신에게 들이닥칠 외로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가 샘의 고민이었죠. 혼자 나는 새, 혼자 기어 다니고 있는 바닷게와 동질감을 느끼는 양, 혼자 남게 될 세상에서 자신이 겪어야 할 외로움을 고민하는 샘 그 자신은 분명 어린아이가 맞지만, 그가 품고 있는 고민은 절대 어리지도, 간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가족이 모두 죽고 난 뒤 본인이 겪어야 하는 외로움, 즉 상황적 외로움에 대한 대처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가족이 있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갖게 될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우리들의 삶의 의미는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 대한 상실은 삶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만큼의 고통과 외로움을 수반할 것입니다. 샘은 보다 단순한 지점에서 고민을 시작했겠지만, 결국 고민이 가리키는 방향은 그 누가 고민의 주체여도 도달할 지점, 즉 절대적인 외로움의 고통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귀여운 아이들이 가끔 구석에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을 때, 어쩌면 그들은 지금 당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홀로 있음(aloneness)은 외로움(loneliness)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친한 친구와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에 가서 감동과 환희를 맛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의 경험은 분명 그 시간, 그 공간에 있던 친구와의 공통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연 중에 당신이 가졌던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친구와 같은 결의 감정, 공통의 감정뿐이었을까요? 모두가 웃는 가운데 나 혼자에게만 슬픔이 밀려들 수도, 혹은 나만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와 같은 경험의 장에 있어도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외로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햇살 속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비애가 더욱 선명해질 수 있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삶에 쫓겨 몇 년째 계획만 했던 나 홀로 유럽행을 마침내 단행했을 때를 생각해 볼까요? 같은 장소에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이방인들 사이를 홀로 거닐면서도 우리는 극한의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했던,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 이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이 될 수 있고, 이럴 때 우리는 혼자 있음이 외로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언제부터 홀로 있다는 것과 외로움이 등가를 갖게 되었을 까요? 외로움은 다분히 감정을 말하는 것이고, 홀로 있음은 숫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말이죠. 홀로 있다는 것(alone)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 라르스 스벤젠의 표현처럼 오롯이 all -one인 상태, 즉 내가 모든 것인 상태를 말할 뿐으로, 그 자체로는 긍정과 부정을 말할 수 없거나, 오히려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한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가 오직 나 하나이니 말이죠. 그에 비해, 외로움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혼용되어 사용되는 외로움과 고독(solitute)을 구분하여 고독을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으로 보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철학자들도 많습니다.


영화 속 샘은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스스로 외로움의 시간을 만들어, 적응훈련에 나섭니다. 즐거운 가족들의 모습에서 애써 슬픈 미래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그들로부터 소외시키고자 노력하는 샘의 모습은 그 순수한 진지함으로 어린이다운 사랑스러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을 단순하게 외로움의 시간으로 등치 시켰고, 타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소외를 본인이 스스로 행함으로써, 사실상 샘의 외로움 적응훈련은 전제부터 잘못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잘못된 전제 자체가 영화의 결말, 즉 외로움을 적응하기 위한 훈련 자체가 애초에 샘에게는 필요도, 의미도 없었다는 것과 자연스레 맥락이 닿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른도 어른 하기 싫을 때가 있다

어른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을 까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고, 아빠는 아빠였습니다.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였죠. 단 한 번도 그들이 나처럼 아기로 태어났을 거라는 생각 없이, 세월의 바퀴에 휘말려 쉴 새 없이 굴러다니다 정신 차리게 될 어느 날, 어느새 나 역시 그들의 나이에 도달해 태어날 때부터 어른인 척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많은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뒤에 두고 너무 멀리 와버려서 인지, 자신이 어렸을 때 이 세상 속에 어떤 생각과 꿈을 담아 두었었는지, 어떤 고민이 나를 영화 속 샘만큼이나 심각하게 만들었는지 모두 잊은 모양입니다.

"어른"이라는 타이틀로 어린아이의 상상력과 고민은 미성숙의 산물쯤으로 쉽사리 치부해 버리니 말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바로 그런 어른들의 시선과 강압 때문에 “어린이”가 하기 싫었던 경험 역시 누구나 있었을 테죠. 지금 우리가 어른으로서의 책무와 성공을 바라는 가족, 공동체, 사회의 지나친 압박 때문에 “어른”이 하기 싫듯이 말이죠. 가끔은 위아영(2014)의 벤 스틸러, 나오미 왓츠 부부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20대로 돌아간 듯 행동해 보는 것도 일상의 무게에서 해방되는 방법이자, 현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재고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합법적이고 윤리적이며, 너무 지나치지 않다면 말이죠.

위아영의 벤 스틸러와 아담 드라이버


어두운 밤, 조용히 천장을 응시하던 어린 프리다를 떠올려 볼까요?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의 프리다는 부모를 갑작스럽게 잃고 새로운 환경에 말 그대로 홀로 던져져 소외된 채, 외로움으로 가득한 시간을 6살의 나이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잠 못 이루었던 수많은 밤, 어린 소녀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이 성인들의 고통과 달랐을까요?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침묵뿐이었던 그때 그 밤의 프리다는 어른과 다를 바 없는 고통에 찬 영혼을 어린 몸에 가두어두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의 항변, 그녀의 울음이 우리 마음속에 언제까지고 크게 소용돌이 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단지 어린아이의 응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외로움의 깊이는 얼마쯤 일까


어린 날 나의 고민들은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무게로 나를 짓눌렀을 겁니다. 이제는 그 힘듬을 다 잊고, 그저 힘들었었다던 기억만 전설처럼 떠도는 나이가 되어버린 지 오래일지라도, 샘이나 테스, 그리고 프리다의 모습을 보면 그 시절 우리에게 심각했던 문제들이 조금은 떠오르실 겁니다. 그런 저런 문제들로 어린이가 지독히도 하기 싫었던 우리는 이제 자라서, 어린 시절 그런 문제들과는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른으로서 감당하기 싫은 문제들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심각했던 그 문제들이나 현재 당면한 문제들이나 나를 내리누르는 무게에서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른이 하기 싫은 시간이 찾아온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늙지 않는 나,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죠. “ 너 어렸을 때 참 힘들었겠다…”




의도적 외로움: 나를 만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샘은 바닷가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외로움의 처방제인 추억을 위해 달려 나갑니다. 혼자 있는 시간만큼 추억을 쌓을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한 샘다운 결론이었습니다.


영화의 결론과는 다르게 할아버지의 말을 해석해 볼까요?

부인을 잃고 바닷가에서 혼자 사는 그였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혼자라는 것이 결코 외로움과 등가가 아님을 실제로 확인해 준다고도 보입니다. 고립을 통한 사회적인 외로움은 겪을 망정, 정서적 외로움을 겪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추억의 힘으로 외롭지 않다고는 하나,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기억만으로 부재의 현존을 부정할 수는 없음을 오히려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기억 안에서만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실체가 없음이 강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홀로 된 시간은 그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여름 장마처럼 말이죠. 그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혼자인 시간을 선택할 기회가 여전히 주어져있습니다. 인간이 세상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려면 외로움이 주는 아픔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세상 속의 나를 알고, 세상을 의식할 필요 없는, 세상의 시선 따위 모래알만큼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어린이 같은 나 자신, 어른이로서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갖기 위해 우리는 꼭 홀로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외로움을 뛰어넘어 내 안의 순수를 찾고, 어린 날 나를 꿈꾸게 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시간, 즉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와 ‘나’가 보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성찰을 거친 후 돌아간 일상에서 만난 타자들은 결코 나를 얽매는 존재가 아닌, 나와 대등한 주체적 관계가 되어 우리는 드디어 타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18세기에 낭만주의 문학을 열었던 워즈워스의 유명한 시 ‘무지개’입니다. 어린아이가 왜 어른의 아버지일까? 어쩌면 어린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순수한 것에 대한 진심 어린 감탄”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을까?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현대의 우리는 관습적으로 순수함이란 단어는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나이 든 자들, 어른이 되어버린 자들이 순수함과 결부될 때는, 조롱과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여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순수함을 주창하지도 부르짖지도 못하는 이런 소심한 후세들에게, 워즈워스는 말합니다. "50, 60이 되어서도 순수하고 싶다, 그러지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말이죠. 시인은 왜그렇게 순수함을 죽는 순간까지도 지니고 싶어 했던 걸까요?


우리의 고독의 시간이란 우리가 우리 내면의 자아와 만나, 그 자아와의 대화를 통해 내적 성장을 이뤄 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독의 시간에 우리가 만나는 자아는 태곳적 자아, 태어났던 그대로의 자아, 우리의 자연 즉 우리의 손상되지 않은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자아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처럼 여전히 순수한 우리가 깃들어져 있기에,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것일 겁니다. 결국 시인에게 순수함이란 자신의 본연과 만난다는 의미이며, 시는 자신의 본연에서 우러나와야 쓸 수 있다는 의미가 되므로, 시인은 그렇게나 간절히 순수함을 희구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시인이 아닌 우리지만 우리 역시 간절히 순수함을 원하고 순수함을 찾는 일을 멈춰서는 안되는 이유는, 나의 순수한 자아를 만나야만 본연의 나를 알고 완전한 나를 회복하여, 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순수한 자아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나를 완전한 고독에 이르도록 해줄 수 있는 건, 내 고독의 끝에서 빛으로 기다려 줄 특별한 타인이 있기 때문 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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