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2018)>
햇살 좋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창문이 미처 막지 못할 정도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던 햇살이 제 방 창의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와 저의 작은 방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걸 바라보며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의 숀펜의 말처럼 이 작은 따듯함의 장면에 머물고 싶어 멍하니 알 수 없는 행복감에 빠져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작은 행복,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까요?
아름다운 계절은, 항상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이 그러하듯, 그 황홀함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저장하면서까지 처참할 정도로 매달리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바뀌어가다, 어느 날 아침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들을 마주합니다. 이런 계절에 맞춰 우리 역시 어제와는 전혀 다른 두께의 옷을 꺼내 입으며, 전혀 다른 향기와 색채를 띤 거리로 나섭니다. 며칠이 지나면 변화된 계절에서 또다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지라도, 바로 그 순간만큼은 정확한 순환구조를 가진 자연의 잔인함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집니다. 불가능하더라도 말이죠.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라는 회의와 비관으로 가득한 채 집으로 들어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어젯밤 읽다 말고 책상 위에 놓아둔 책과 눈이 마주칩니다. 아! 책이 있었지. 마치 날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 나의 책. 그리고 책 속의 그들. 저의 정면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미국을 회상하며 유머러스한 말솜씨로 너스레를 떠는 빌 브라이슨이 보이네요.
그 옆 책장에는 파리에서 작가 초년생으로 누구보다 진실된 문장을 찾기 위해 작은 카페에서 추위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글을 쓰고 있는 헤밍웨이가 있고요. 그 아래쪽에는 글쓰기 전용 모자와 앞치마를 착용하고 얼굴이 상기된 채 열심히 펜촉을 적셔가며 글을 쓰고 있는 작은 아씨들의 조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그들을 만난 그대로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가 더없이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가 위로받았던 그들의 세상. 그래요. 이 세상이 유난히 나를 외롭게 만들 때, 나에게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고, 그래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2018)'의 어른 크리스토퍼 로빈의 어린 시절은 정말로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거죠.
책과 그 책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세상은 어린 저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었고, 현실로는 가볼 수 없는 곳을 데려갔으며 실제로 경험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건과 감정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책이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면 여러분은 믿을 수 있나요? 그리고, 책이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 지리적으로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두 남녀를 만나게 해 주었다면 이 역시 선뜻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바로, 이런 소재의 원작을 영화화 한 작품이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2018)'입니다.
영화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은 2018년에 개봉한 영국의 역사 드라마 영화입니다.
감독인 마이크 뉴웰은 1942년생의 영국 감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 ‘해리포터와 불의 잔(2005)’, ‘페르시아 왕자:시간의 모래(2010)’가 있습니다.
주연인 줄리엣 애쉬턴 역은 ‘베이비 드라이버(2017), 맘마미아 2(2018), 예스터데이(2019)’로 국내 팬들에게 알려진 영국 배우 릴리 제임스가 맡아 청순하면서 엉뚱한 면을 지닌 주인공의 캐릭터에 딱 들어맞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도시 아담스 역은 왕좌의 게임에서 다리오 나하리스역으로 좋은 연기를 보였던 네덜란드 배우 미휠 후이스만이 맡아 건지 섬에 사는 지적인 양돈 농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는 1941년의 야심한 밤에 건지 섬에 사는 네 명의 사람들이 통행금지에 걸리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건지 섬을 점령했던 독일군들은 섬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쳐서 허가받은 범위 내에서만 통행을 허락했습니다. 이들 네 명은 무단으로 돌아다니다가 독일군에게 걸리게 된 것이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들은 문학회인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활동 후 귀가하던 중이었다 둘러댔고 그들의 모임은 이렇게 얼떨결에 만들어 지게 됩니다. 바로 책이 이들의 목숨을 실제로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현재인 1946년 런던으로 옵니다. 작가인 줄리엣은 출판업자이자 친구인 시드니와 자신의 책 낭독회에 참석합니다. 줄리엣은 ‘이지 비커스태프’라는 필명으로 전쟁에 대한 책을 출간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나 이제는 본인의 실명을 걸고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쓰고 싶어 합니다. 때마침 내키지 않는 책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고민에 빠진 줄리엣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됩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건지 섬에 사는 도시 아담스라는 농부로 우연히 손에 넣은 책 표지에 적힌 줄리엣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편지를 썼다고 밝히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찰스 램의 책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또한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이라는 묘한 이름의 문학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본인을 소개합니다. 이때부터 줄리엣은 도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모임의 유래를 알게 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군이 건지 섬을 점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새책을 써야 하는 줄리엣은 도시의 이야기와 건지 섬의 사람들에게 매료되어 건지 섬을 직접 방문하여 문학회에 참석하고 그들의 이야기로 글을 써보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건지 섬으로 가는 줄리엣은 항구까지 배웅 나온 남자 친구로부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와 함께 청혼을 받고 승낙을 한 후 배에 올라탑니다.
건지 섬에 도착한 줄리엣은 섬에 머물며 문학회에 참석하여 문학회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나 회원인 아멜리아의 반대로 문학회에 대한 글은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건지 섬의 사람들과 그들의 독일군 점령 시절에 매료된 줄리엣은 섬에 좀 더 머물며 도시와 문학회 사람들에 대해 알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문학회의 핵심 멤버인 엘리자베스가 독일군에게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사실과, 도시가 키우고 있는 킷이라는 여자아이가 엘리자베스와 섬에 왔던 독일군 장병 사이에 낳은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 독일군 장병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가던 중 배가 침몰되어 사망했다는 사실도 말이죠. 문학회원 모두가 사랑했던 엘리자베스와 킷의 사연을 알게 된 줄리엣은 더욱더 건지 섬의 문학회 사람들에게 매료됩니다.
엘리자베스만을 기다리고 있는 문학회 사람들과 그녀의 딸 킷을 위해 엘리자베스의 소재 파악을 위해 약혼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그 결과 엘리자베스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 수용소에서 이미 총살당했음을 알게 됩니다. 건지 섬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줄리엣은 약혼자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오지만, 건지 섬에 머무는 동안 도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죠. 런던으로 돌아온 줄리엣은 약혼자와 헤어지고, 건지 섬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건지 섬과 문학회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줄리엣은 글쓰기에 빠져들게 되고 마침내 이야기를 완성하여, 출간하지 않은 완성된 원고 그대로를 건지 섬의 문학회 사람들에게 보내줍니다. 줄리엣의 원고와 편지를 읽은 도시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출발하고, 때마침 도시를 찾아 건지 섬으로 가려던 줄리엣을 만나 둘은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여 킷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원래 2008년에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고 전 세계 3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습니다. 작가는 미국인인 매리 앤 셰퍼와 매리의 조카인 애니 배로스입니다. 도서관의 사서이자 서점의 직원이었고 문학회 회원이었던 매리 앤 셰퍼의 아이디어와 스토리가 기반이 되었으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 매리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됨에 따라 조카인 애니 배로스가 마무리 작업을 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탄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작가인 매리 앤 셰퍼는 평생 책을 출간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녀가 원래 관심을 두고 쓰려고 했던 이야기는 영국의 극지방 탐험가였던 로버트 팰콘 스콧의 아내 케이틀린 스콧의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콧의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낙담한 매리는 채널제도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건지 섬에 들르게 되었고, 건지 섬을 떠나려던 날 때마침 짙게 낀 안개로 출발을 할 수 없어 공항에 발이 묶여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서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매리가 들렸던 1980년대 건지 공항 내의 서점에는 주로 2차 세계대전중 독일 점령기에 대한 책이 주류를 이루었고, 안개가 걷히고 공항을 떠나던 매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건지 섬의 점령기 시절의 이야기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20년이 지나 매리가 속한 글쓰기 모임의 회원들은 매리에게 글쓰기를 강력하게 권했고,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소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이라고 합니다. 소설의 탄생과정 역시 소설 못지않죠.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건지 섬은 많은 분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지명일 텐데요. 건지 섬은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에 있는 영국해협에 위치한 여러 섬들 중 하나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에 보다 치우쳐 있습니다. 영국 왕실 직할령으로 분류되어있고, 레미제라블을 쓴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여 그에 따른 관광산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실제 나치 독일은 1940년 7월부터 1945년 5월 9일까지 건지 섬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이 기간 중에 일어났던 일들이 원작에는 더욱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륙 진출의 전초기지로 섬을 이용하기 위해 섬주민을 고립시켰지만 실제로는 독일군마저 고립되어 섬주민들과 함께 배고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일부 독일군들은 섬주민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영화 속 엘리자베스처럼 섬주민과 사랑에 빠졌던 독일군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빠져나간 5월 9일은 건지의 해방일로써 섬주민 모두가 축제를 여는 날이기도 합니다.
독일군 점령기에 고통받았던 채널제도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빛나는 강인함을 알리고 싶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장벽도 초월 가능함을 모든 사람이 믿게 하고 싶었다. (매리 앤 셰퍼)
작은 아씨들의 조의 입을 통해 루이자 메이 올콧은 방안 가득 책만 있어도 행복하다 말했습니다. 로마의 달변가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몸과 다르지 않다고 했죠. 버지니아 울프의 연인으로 알려진 비타 색빌-웨스트 역시 책으로 가득한 다락방에서 평생 살고 싶어 했고, 우리의 파파 헤밍웨이는 책만큼 충성스러운 친구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작가들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의미를 갖는 각자의 책이 존재합니다. 다만 저의 경우처럼 혹은 크리스토퍼 로빈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른이 되고 난 후, 그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소중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외로워하고 허전해하면서도 언제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세상의 문을 두드려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침대 옆 책상에는 늘 서너 권의 책들이 놓여있습니다. 만나고 싶은 책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을 올려놓고 침대에 누워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나와 마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 서럽고, 어린 날이 그리운 날에는, 어린 날 당신과 함께 했던 책을 펼쳐보세요. 그 안에서 어린 날의 당신이 보았던 세상과 그 세상에 푹 빠져있던 어린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