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시간 속에서 찾은 나의 온전함
별다를 것 없는 출근길, 문득 마음에서 반항심이 일었다. 뒷수습이 필요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일단 저질렀다. 내 마음이 간절히 원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업무적으로 가장 자리를 비우기 힘든 시기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시마 여행을 결정했다. 커리어 성장의 기회도 소중하지만, 결국 내 삶의 중심은 내가 잡아야 했다. 타이틀이나 명예로 유지되는 균형은 결국 모래성일 뿐이다.
여행의 첫 관문은 타카마츠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동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선한 면과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내게는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도시의 우동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지인 말에 따르면,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 없이 타카마츠에서 우동집을 개업할 수 없단다. 이 때문에 타카마츠에서는 유명한 집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맛이 보장된 우동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에는 정직한 땀방울과 부지런함이 배어 있다. 유명세와는 무관하게, 타카마츠는 부지런하고 인자한 아저씨의 얼굴을 띄고 있다. 큰 욕심 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누구에게든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건네줄 것만 같다.
타카마츠 다음으로 ‘여자 섬’이라 불리는 메기지마에 닿았다. 작은 항구, 소박한 골목들, 그리고 폐가를 재건축한 공간들은 성수동의 힙한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100명 남짓 사는 이 작고 한적한 섬을 위로하듯 고양이들이 조용한 길 모퉁이를 지키기도 한다. 섬의 느린 일상에 섞여 별 생각 없이 걷다가 섬 구석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노부부가 오랜 세월 잘 돌본 듯한 테이블,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가꾼 듯 안 가꾼 것 같은 소담한 정원이 보이는 유리창, 다양한 국가의 언어와 그림체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방문록. 손님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도 그곳은 아기자기하고 정성스럽게 가꿔져 있었다. 돈벌이가 아니라 섬과 그 공간을 아끼는 애정이 내 마음으로 훅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메기지마는 내게 곧 그 노부부의 얼굴이었다. 사랑과 다정함으로 작은 세계를 아름답게 지켜내는 따뜻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나오시마였다. 항구에서부터 초대된 손님을 맞이해주는 눈부신 야요이 쿠사마의 빨간 호박, 그리고 그 옆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는 푸른 바다, 시작부터 참 우아한 첫인상이었다. 나오시마 골목 골목을 거닐며 자연과 예술, 그리고 현대 건축의 경계가 흐려질 때쯤 지추 미술관을 만났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덕분에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느라 바쁘지 않았다. 오로지 내 눈과 마음으로만 작품과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빛과 그림자, 차갑고도 따스한 건축의 숨결이 마치 내 호흡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면서 비로소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미술관에서 항구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버스 대신 느리게 걸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초승달은 그 위에 살짝 걸려 있었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그 느린 시간이 가장 큰 호사로 다가왔다. 동행과 나눈 대화, 잊지 못할 풍경,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열심히 일해서 또 오자는 마음으로 가슴을 뜨겁게 채웠다. 그 순간 일과 돈은 다시 도구로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삶의 본질은 어쩌면 이런 작은 평화에 있지 않을까.
나오시마는 나에게 권위 있지만 겸손한 예술가의 얼굴로 남았다. 부유하지만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지닌 여유를 조용히 나누는 얼굴. 온전함은 멀리 있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와 사소한 선택, 평범한 시간 속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마음 편한 침묵이 머무는, 느긋한 여행이었다. 타카마츠의 리쓰린 공원에서 가졌던 티 타임 같은 여행이었다. 동행들과 조용한 찻집에 앉아 각자의 차를 마신다. 깊은 대화도 불필요한 수식도 없다. 오래된 정원 속에서 서로의 쉼을 존중하며 말 없는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