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쉽게 오진 않겠지
예민하고 민감한 성향의 여자가 아내로, 아내에서 엄마가 되어가는 성장 에세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도움이 되었던 책이나 강연, 글들도 공유해봅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배가 부른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나는 선홍빛 가로줄을 새겨 받은 다소 쭈글 하고 홀쭉해진 배를 하고 다시 타자를 친다. 딩크족이라고 소리치고 다녔던 내가 딸 등신이 되어 다시 모니터 앞에 섰다.
짧은 일 년이었지만 내겐 한 평생 같았던 지난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격정적인 날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기가 나오기 한 달 전 이전 집보다는 큰집으로 이사를 하여 갖은 살림살이와 아기의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태교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한 명의 또 다른 생명이 세상에 난다라는 걸 증명하듯이 우리 집에는 나날이 새로운 물건으로 가득 찼다. 매일같이 현관문 앞에는 크고 작은 택배박스들이 쌓였고, 나는 신이 나서 꺼내고 분리하고 소독하고 보관하는 일을 반복했다.
나는 거의 18kg이 쪘다. 막달이 되어갈수록 몸이 더 불어 욕심만큼 먹고 나면 명치끝 갈비뼈가 걸려 숨 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배에는 검은 털들이 자라났고 엉덩이 밑, 양 허벅지에는 크게 불에 덴 것처럼 얼룩덜룩 붉은 점이 생겼다. 남들보다 유난히 배가 커 1시간 이상 잠을 연결하지 못했고 화장실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자다가는 종종 쥐가 나 뻣뻣해진 다리를 주무르기 바빳고, 뒤뚱이고 절뚝이며 걷는 날이 잦아졌다. 입덧이 없어 다행이었다지만 만삭 때는 오른쪽 환도가 서 뼈의 통증이 심해져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힘들었던 나날이었다.
반면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주변에서는 예쁜 것만 보고 예쁜 것만 먹고 예쁜 것만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임신 상태인 나는 초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임신한 암캐와 다를 게 없었다.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잔소리도 시아부지의 잦은 안부 연락에도 주변의 크고 작은 소음에도 반려견의 애타는 시선에도 도통 마음이 어질지 못했다. 주변에 신경질을 낸다거나 짜증을 내진 않았다하지만 실상 그 부정적인 감정은 내가 그리고 아기가 듣고 느꼈을테다. 그런 생각이 들고나면 죄책감과 자괴감에 다시 명상을 하고 좋은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인상이 쓰이면 또 다시 마음을 다 잡는 게 하루 일상이기도 했다. 나중엔 정신병인가 걱정이 될 정도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의 온도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따뜻해졌다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만삭의 임산부는 견딜만했다. 혼자 있으면 엉엉 울기도,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나를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처럼 세상 다정한 배려와 친절을 베푸는 남편 덕분에 모든 아픔을 견딜 수 있었다. 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넘칠 만큼 행복했다. 퉁퉁 불은 모습에도 예쁘다고 이야기해주는 남편이 있어 하루하루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힘이 된다는 걸 새삼 몸소 깨달았다.
여러 가지 질환과 불안장애로 선택제왕을 하게 되어 날짜를 잡았다. 아래를 찢든 배를 찢든 살을 째서 나오는 건 마찬가지이니 빈뇨가 심한 나로서는 차라리 배를 찢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선명한 상처쯤이야 내 아기와의 소중한 추억이자 기억이니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수술 날짜는 정해졌다. 하지만 아기는 의사와 부모가 협의한 날짜에 협의하지 않았다. 세상이 궁금했는지 자궁 안이 답답했는지 아기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가량 빨리 나오겠다고 신호를 보냈다. 이슬을 내비치더니 몇시간 후 양수를 터트린 것이다.
불안장애에 겁 많고 나약한 내가 진통을 겪고, 피 뽑는 주사도 잘 못 보고 발 동동이던 내가 두발로 수술대에 올라 온갖 마취 주사를 정통으로 맞았다. 제왕절개였지만 담당의가 올 때까지 두어 시간의 진통을 맛보기도 했다. 양수가 터져 급속도로 자궁문이 열리는 와중에 밑에서는 무언가가 벌컥벌컥 나와댔다. 간호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자궁문이 3센티가량 열렸다고 읊조리듯 건내고 나갔다. 속으론 벌벌 떨었지만 담당의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진통에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이를 악 물며 손톱이 손에 파이도록 꽉 지어가며 견뎠다. 그렇게 잘 버틸 수 있던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곁에서 손을 꼬옥 잡고 함께 견뎌 준 남편이오. 두번째로는 스스로에게 건 최면이었다.
예전 어느 곳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 다녀온 후 가치관의 큰 변화가 있었다는 연구보고를 주어들었다. 오버뷰 이팩트(the overview effect). 신비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매료된 내게 오버뷰 이팩트는 고마운 플라시보였다. 진통이 오고 공포감이 밀려올 때마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병실 위를, 병원 위를, 지역 위를, 지형 위를, 하늘 위를 시선을 멀리 보내어 우주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려고 노렸했다. 효과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아픔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침착하고 담담할 수 있었다고 해야할까. 마치 제 3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그때를 떠올리면 아련하게 느껴진다. 수술이 끝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회복실을 찾은 남편은 산소마스크 너머로 대차게 들리는 나의 코 고는 소리에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실소가 나왔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출산 자체는 사실 무서운 게 아니었다. (자연분만은 상상도 안 하련다.) 진짜 무서운 건 아이가 나오는 순간부터였다. 출산의 아픔은 아기가 나오면 끝나지만 육아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삶에 찾아온 첫 번째 미션은 아기 젖 물리기였다. 작은 챕터로 자세히 나눠 젖 돌기라고 해야 할까. 소시민 가슴을 가진 나라 젖이 나오지 않을 거란 나의 예상을 무참히 깨고 아가를 위해 퐁퐁 솟는 모유란... 참으로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너무나 아파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