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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Kim Jan 11. 2021

"어른이 되는 시간"

#4. 외로움에 대하여

                    

                                                                                                                     

무성한 나무도 없이 짧은 풀들만 간신히 자라는 민낯이 드러난 절벽 끝. 높은 절벽 아래에는 새까만 바닷물만 철썩 인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둑한 늦은 오후.

나는 얇은 철제 우산을 들고 절벽 끝에 서있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힐까 온 힘을 다해 얇은 철제 기둥을 잡는다. 안간힘을 쓰며 우산을 들고 있는 내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속세의 일은 상관없이 무정한 비바람은 더욱 세력을 넓히며 몰아친다. 작은 철제 우산이 겨우 내 머리 정도만 비에 젖지 않게 도와줄지언정, 놓치지 않고 잡고 있어야 했다.


점점 비바람과 하나가 되어 우산도 나도 함께 날아갈 것 같지만 버텨내고 있다. 누군가 이곳에 있는 나에게 튼튼한 우비로 차가운 비바람을 피하게 해 주거나, 안락한 차로 태워주길 기다린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그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절벽을 지나가는 길을 아무리 바라봐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차가워진 발과 부르르 떠는 몸으로 나는 내 몫만큼 버텨내야 한다. 그 버팀의 시간이 지나면 이 비바람도 따스한 햇살로 바뀌리라는 것을 믿으며. 오로지 그것 하나만이 희망이다.


나에게 외로움이란 이런 느낌이었다.

비바람 부는 절벽에 서서 얇은 우산을 매달리듯 잡고 있는 느낌. 세찬 비바람 속에 들어가 있지만,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거센 폭풍우 속에 혼자만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나는 19년 동안 시골에 살았다. 기차도 한두 번 타본 것이 다였고 서울은 가본 적도 없었다. 일탈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보고, 부모님 말씀에 반항 한번 한적 없던 순박한 시골 여학생이었다. 화장하는 법도, 꾸미는 법도 모르고 부모 밑에서 조용히 자라던 나는 도시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은 내가 알던 세상보다 너무 컸고, 너무 다양했다.


생전 처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수업을 듣고 모르는 사람들과 생활을 해야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고, 누가 도와줄지도 몰랐다. 동굴 같은 적막한 방 안에서 뻣뻣한 새 이불을 덮고 누워 잠을 청하던 깊은 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웠지만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동굴 같은 내 방에 처박혀 밖이 무서워 덜덜 떨던 작은 시골쥐 같았다. 도시가 무서워 몸도 마음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망가진 컴퓨터를 수리하고 찾아오던 길이었다. 당시 컴퓨터는 엄청 무겁고 컸다. 큰 사과 박스만 한 컴퓨터를 걸어서 약 10분 거리의 우리 집까지 들고 와야 했다. 컴퓨터를 들고 열 걸음 걷고 쉬고 다시 열 걸음 걸었다. 팔은 아프고 손도 아프고 어깨는 빠질 것 같았다. 땀은 또 어찌나 나던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가면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주기도 잘하던데 나는 그런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최고로 말라있던 시절이었기에 누가 봐도 여리여리했건만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을 지나는 모두는 나에게 무신경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10분이라는 집까지의 거리가 한 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에피소드는 누구에게나 종종 벌어지는 일일 텐데 나는 이때의 기억이 간혹 가다 떠오르곤 했다. 그때의 그 감정이 생생히 살아나곤 했다.


컴퓨터를 들고 가던 나는 그냥 무거움을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막막함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가 도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의지하고픈 마음을 품고 있었다.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아야 했다. 홀로 모든 걸 헤쳐나가야 하는 때가 온 거라고. 그것이 못내 서럽고 비참했고 외로웠고 무서웠다.

나는 아직 혼자 모든 걸 하기에 약하다고 생각했었다.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마음도 약하다고. 나는 거대한 세상에 겁을 먹어버렸다. 나는 약한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세상이 무서워 나는 내 동굴에 더더욱 웅크리고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17년이 지난 후 나는 아이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우는 날이 안 우는 날보다 많았다. 아이의 울음만큼 나도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이 더욱 거세어지는 일이 생겼다. 양가 도움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아이의 입원은 큰 폭풍이 되었다.


아이가 6개월이던 17년 3월, 아이는 요로 감염에 걸렸고 항생제를 써도 낫질 않아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결과 신우신염으로 신장에 염증이 발견되었다. 입원 당일, 짐을 챙기러 집에 왔고 아이를 점퍼루에 앉혔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신나게 점퍼루를 타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에는 먹구름이 꼈다. 그리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입원 후 우리는 하루 이틀이면 퇴원하겠지 생각했으나 입원 기간은 점점 길어졌다. 하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검사를 다 했고, 항생제를 계속 먹으니 아이의 변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병실은 바싹 말라 부서질 정도로 건조했고 낮엔 덥고 밤엔 추웠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감기에 걸렸고 아이가 먹는 약은 점점 늘어갔다. 그때 새언니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친정식구는 모두 그곳에 갔다. 시댁 식구는 전화만 하고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저마다의 이유 있는 사정은 있었다.


낮에는 아이를 안고 애써 움직이려 노력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커피 하나 마시려면 아기 띠로 아이를 안고 링거대를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 일쑤였다. 6개월 아기에게는 링거가 일정액 들어갈 수 있게 조절해주는 장치가 링거대에 부착된다. 그것이 툭하면 삑삑 소리가 났고 한참 기다려 겨우 탄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내리길 반복했다.


저녁이 되어 저녁밥이 나오면 옆 침대에는 친정 부모님이 반찬을 싸 들고 오고, 시부모님이 오고, 친구들이 와서 떠들썩했다. 나는 신랑조차도 일하느라 저녁 8시 넘어서 오는 상황이었다. 누워서 노는 아이 옆에 앉아 침대 커튼을 끝까지 쳤다. 그러고 나면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옆 침대 아이는 겨우 감기로 입원했음에도 온 가족이 쫓아와 걱정하건만, 내 아이에게는 부모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부모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이 옆에서 들려오는 시끌한 소리처럼 몸속을 파고드는 것이었겠지. 아이는 링거로 불편한 팔은 개의치 않고 해맑게 아기 체육관 가지고 놀았지만 나는 그 모습에 더 마음이 죄어왔다.


아이의 요도에 관이 들어가고, 아이가 너무 아프다는 듯 울고, 아이 자는 시간 맞추어 검사를 하고, 배고파 우는 아이를 피검사 때문에 먹이지도 못하고, 입원 기간이 길어져 링거 바늘 위치 바꾸고, 설사하고 토하고, 퇴원해도 된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집에 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면서도 우리뿐이었다. 나와 신랑과 아이. 우리 셋뿐이었다.


우리는 아직 부모가 된 지 6개월밖에 안 됐고, 아이는 너무 작고 여렸다. 세상 폭풍우 속에서 나와 신랑은 이 작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온 몸으로 감싸 안아 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를 향해 거센 비가 쏟아지는데 세상에는 우리뿐이었다.


그 후 아이는 정기적으로 신장 초음파 검사를 했다. 입원 후 1년이 지난 2018년 4월에야 이제 괜찮다고 안 와도 된다고 했다. 대학교수는 졸업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진짜 졸업장이라도 딴 느낌이었다. 그 사이 요로 감염 재발에 대한 걱정에 우리가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그러다 2019년 1월 다시 아이 입원이 확정되었다. 2017년 입원 당시의 마음이 나에게 휘몰아쳤다. 결코 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대학병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나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고 숨이 찼으며 손발이 떨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고 나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시 시작된 입원 생활은 더욱 파란만장했다. 당시 홍역이 번지고 있어 면회 금지에 아이는 치료제가 잘 듣질 않았다. 조마조마한 하루 속에서 단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결국 같은 병실 아이가 홍역 의심으로 격리병동 가면서 우리도 홍역 검사를 했다. 작은 아이의 몸이 점점 야위고 갈수록 티브이만 멍하니 보았다. 나는 아이가 잠든 깊은 밤 하루를 기록하듯 글로 적었다. 그렇게나마 쏟아내야 잠을 조금이나마 잘 수 있었다. 아이는 입원 후 2달을 외출을 할 수 없었다. 퇴원 후 회복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조심해야 했고, 창문만 잠시 열었을 뿐인데도 열이 나곤 했다. 조마조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봄이 되었고 우리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그 시간들을 이전에 비하면 우리는 잘 헤쳐 나왔다. 나는 다시 한번 아이와 함께 폭풍우 속에 빠졌지만 다행히 나에겐 글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고여있던 마음의 응어리를 글로 풀어내고, 어렵사리 찾아주고 문자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어 하루하루 버티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커진 나의 마음도 있었다. 한 번 경험해봐서 그런 것이었을까.

이젠 얇은 철제 우산이 아니었다. 우비를 입고 있을 수 있었다. 내 마음도 조금은 더 단단해진 것이리라.








간절히 도움을 원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음에 서러움과 외로움이 사무친다. 누군가의 도움이 무거운 컴퓨터를 대신 들어줄 수도 있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일 수도 있건만 그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 서러움과 외로움은 절실함의 크기만큼, 스스로를 약하다고 정의 내리는 깊이만큼 커진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면 덜 외로웠을까? 어차피 혼자 헤쳐나가야 함을 깨달은 상황이었다면 덜 외로웠을까? 어차피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하니 마음을 더 굳건히 가지게 될까?


아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노력은 더 했겠으나 우리는 여전히 외로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무인도에 떨어져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린 그런 존재니까.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차가움 속에 울던 우리가 아니던가.


그 순간엔 뼛속 깊이 외로웠지만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자 비로소 조금 더 어른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을 견디고 이겨냈다는 하나의 발돋움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가 이해가 되듯이 말이다.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그래서 이제는 마음 아프다. 강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서글픔과 외로움을 견디어냈을지 모르니 말이다.


내 그릇이 빠개질 듯한 아픔을 겪고 나서야 조금씩 커져감을 느낀다. 그 그릇에 생긴 실금이 흉터처럼 보일지언정 나의 그릇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외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때로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건 경험하지 않고 그냥 살고 싶다. 모르고 싶다. 그냥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로 살고 싶기도 하다. 대학 신입생 시절처럼 동굴에 웅크리고 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소를 잃게 된다. 그래선 안 된다.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지키고픈 단 하나니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난관들이 두렵다. 또다시 외로울 것이고 또다시 나는 떨고 울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어른이 되고 세상을 배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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