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숲 속에 하얀 털의 사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어느 여름날,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서 사슴은 노란 손을 씻고 있는 까만 눈의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하얀 털의 사슴이 신기하여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한다. "우리 친구 하자." 사슴은 자신에게 다가 온 미지의 소녀가 두렵지만,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친절한 태도에 소녀와 함께 숲 속을 노닌다.
빛이 다 떨어진 어두운 숲 속의 밤, 소녀는 집에 가지 않고 사슴 곁에 머물러 그를 꼭 안는다. 사슴은 자신을 지켜주는 어린 소녀가 고마워 밤의 동물들이 소녀를 괴롭히지 않도록 밤새 소녀를 지킨다. 어둠이 지나고 아침해가 밝아 오자 소녀는 사슴을 걱정하는 듯 환한 웃음으로 말한다. "잘 잤어?" 사슴은 자신을 염려해주는 까만 눈의 소녀가 고맙다. 사슴의 털이 더욱 하얗게 빛이 난다.
소녀는 사슴을 위해 그가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손수 준비한다. 사슴은 소녀의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가슴속에 무언가가 자라나 커져 있음을 느낀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사슴은 겁이 나서 소녀에게서 한 발 물러선다. 사슴은 소녀를 두고 혼자 바람이 부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홀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다. "사슴아, 가지 마. 나랑 함께 있자." 사슴의 하얀 털이 더 투명하게 빛이 난다. 사슴의 가슴속 무언가가 더 커진다.
까만 밤하늘에 하얀 구름이 실처럼 퍼져있고 파랑, 빨강, 노랑, 하얀 별들이 하늘에서 가득 빛을 내던 밤, 소녀는 사슴에게 말한다. "사랑해." 사슴은 소녀를 꼭 안고 가슴속 기쁨이 넘쳐나 눈물을 흘린다. 사슴도 소녀에게 말한다. "널 사랑해, 진정으로."
들장미가 가득 핀 숲 속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달콤한 과일을 나누어 먹기도 하며 사슴과 소녀는 행복의 시간을 보낸다. 사슴의 하얀 털도 소녀의 까만 눈도 더욱 밝게 빛이 난다. 뜨거운 여름의 한 낮, 둘은 물가에서 서로 장난을 치다가 소녀가 물에 빠지고 만다. 소녀는 차가운 물에 흠뻑 젖고 나와 굳은 표정으로 사슴에게 화를 낸다. 사슴은 소녀가 내는 화에 당황하고 놀라 하얀 털이 순간 검게 변한다. 소녀는 놀라 달아난다. 사슴은 달려가 소녀를 붙잡고, 다시 하얀 털로 변해 소녀를 안심시킨다. 소녀는 검은 털 사슴이 겁이 난다. 사슴은 소녀에게 말한다. "다시 내가 검게 변하면, 나를 꼭 안고 괜찮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줘. 그러면 나는 이내 하얗게 돌아올 거야."
소녀는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이나 좋아하는 것들을 사슴에게 말하며 같이 하자고 하고 많은 것들을 계획한다. 사슴은 그저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도 늘 소녀와 함께 한다. 소녀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이젠 사슴에게 일상이자 삶이 되었고, 처음 느껴 본 행복의 시간들에 사슴은 환하게 빛이 난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 소녀는 다시 물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사슴은 소녀가 다칠까 다시 물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녀는 물놀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신나게 놀던 소녀는 발을 헛디뎌 다시 물에 빠지고 만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예쁜 분홍색 드레스가 완전히 물에 젖어버린다. 소녀는 엉망이 된 표정으로 사슴에게 화를 낸다. 사슴은 그녀의 분노에 놀라 다시 검은 털로 변한다. 소녀는 사슴이 무서워 자신의 집으로 도망간다.
검은 사슴은 숲 속을 벗어나 소녀의 집으로 간다. 소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불러보지만 소녀는 아무 대답이 없다. 소녀는 하얀 사슴을 사랑했지만, 검은 사슴은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했다. 검은 사슴은 매일같이 그녀의 집을 찾아가고, 그때마다 사슴의 검은 털은 더욱 까맣고 어둡게 변해 간다. 그럴수록 소녀는 사슴이 더 무서워진다. 사슴이 소녀에게 말했던 그 하나의 위로를, 소녀는 검은 사슴을 꼭 안고 따뜻한 말을 전하지 않는다. 사슴은 간절히 그녀의 위로를 바랐지만, 그녀만이 사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에, 그래서 얼른 다시 하얀 털로 돌아와 소녀와 사랑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하나의 위로 없이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의 차갑고 단호한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소녀가 사슴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으로 사슴은 먼저 소녀를 떠난다.
숲 속으로 돌아간 사슴은 고통에 못 이겨 검은 털마저 불에 탄 듯 재가 되어 버리고 몸에서 모든 털이 사라진다. 사슴의 아름답게 빛나던 하얀 털은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소녀와 사랑, 행복을 잃고 싶지 않은 사슴은 소녀를 다시 찾아간다. 제발 다시 시작하자고 눈물 흘린다. 소녀는 사슴이 먼저 자기를 떠난 것에 상처를 받고, 이제 아름답던 하얀 털마저 사라진 사슴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린다. 소녀는 사슴에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오지 마."
벌거숭이 사슴은 숲 속으로 홀로 돌아온다.사슴의 일상 모든 것이 소녀와 함께 했던 것들이기에, 소녀가 없는 사슴의 삶은 아무런 색도 없이 의미를 잃어갔다. 소녀에 대한 걱정, 안타까움, 후회, 슬픔, 분노 모든 것들이 사슴의 정신을 잃게 한다. 소녀를 잃은 고통이 그의 모든 것을 잠식해 버린다. 사슴은 세찬 바람이 부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그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그의 다리가 터지게, 그의 고통이 잊힐 수 있게 거칠게 내달린다. 바람이 부는 언덕 끝 절벽으로 사슴은 끝까지 달려간다. 사슴은 벼량 아래로 떨어지고 모든 것을 잊으려 죽음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하얀 털의 사슴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