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내게 천천히 말했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상처를 받고 있었던 거예요. 행복의 순간들에 마취당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깨닫게 되었죠. 내가 그녀를 만나서 평소와 달리 그렇게 불안했던 이유가, 그녀가 내게 준 상처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의 갈색 눈동자에 슬픔이 짙게 물들었다. 나는 그의 잔에 위스키를 조금 따르고 얼음 몇 개를 더 넣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 소리가 실내에 깊이 울리며 그는 잠시 추억에 잠긴 듯했다. 나는 위스키 한 잔을 더 마신 후 그에게 물었다. "그녀를 만나고서 살면서 처음 행복을 느껴봤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그랬어요. 그녀와 만난 게 두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생처음 행복이라는 감정이 가슴에서 벅차 올라, 입 밖으로 행복해라는 단어를 수없이 내뱉었죠. 그 사람이 먼저 내게 사랑한다 고백하고,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 함께 자며 보살펴 주고, 따뜻한 밥을 해서 차려주고, 주말 내내 같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얘기를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서로를 보살펴주고……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때는 그녀와 당연히 결혼해서 남은 생을 그녀와 모두 함께 보내리라, 그런 결심을 했었죠. 어쩌면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따뜻한 가정이라는 곳을 그녀의 집에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행복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죠."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 남자는 그녀와 헤어지고서 한참이나 목놓아 울었으리라, 그래도 아직도 슬픔과 상실의 눈물이 남아있는지, 그의 눈동자는 습기가 베인 듯 짙게 물들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어요. 그녀의 사소한 실수를 내가 조심스럽게 얘기했고,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화를 냈죠. 그녀는 겉으로 강한 척했지만, 사실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지기 싫어서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어요. 심지어 내게도 단 한번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죠. 그녀는 다툼 후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가 혼자 결정을 내버렸어요. 제 의사 따위는 아무 관계도 없이요."그는 잠시 말을 끊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앞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사실 저는 그동안 계속 상처받고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일방적인 행동들, 상대방의 기분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만의 얘기로 상처를 주는 말들, 따뜻했다가 어느 순간 돌연 차갑게 변해서 화를 내는 극단적인 모습,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개입할 수 없는 독단적인 결정, 상대방의 얘기나 아픔을 공감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해야만 하는 행동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준 상대방의 아픔을 제대로 단 한 번 위로해주지 못하는 능력…… 그 안에서 나는 계속 상처받고, 불안했던 거예요. 이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내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성이 판단하고 결론이 나는 순간,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다투고 나서 그녀는 심지에 제게 이렇게 말했죠. 자신은 이제껏 감성 있는 사람과 만나보지 못해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이 큰 만큼 고통도 크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내가 힘들어할걸 알면서도 일부러 끝까지 몰아갔으며, 나를 만난 건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테스트해본 것과 같다고. 앞으로 자신은 더 안정감 있고 단단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죠. 제가 시간을 좀 갖자고 하고 난 며칠 후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제 집 앞에 그녀의 집에 있던 제 물건들을 놓고 갔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허무하고 쉽게 끝이 났죠."
"정말 이기적이고 잔인하네요.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고 행동인가요?" 나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되려 그에게 화를 냈다. 쿵하는 소리가 났고, 주변 사람들이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소 멋쩍은 웃음으로 그들에게 사과의 눈인사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또 많이 미워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게 먼저 다가와서 내 마음을 다 열고 빠지게 한 후에,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맞지 않는 지점이 오니, 냉정하게 관계를 정리한 그 사람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그녀도 그동안 진심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에요. 그녀 역시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도 알아요. 단지 그녀가 나를 운명이라 말하고, 많은 것들이 처음이라 말하고, 사랑한다 고백했던 말들이,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렇게 내게 상처를 주고 쉽게 관계를 정리해버린 그녀를 미워한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죠."
그는 착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바보같이도, 헤어진 후에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만의 방에서 혼자만의 성을 쌓고, 외롭게 아파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내가, 때론 참 한심스럽기도 했어요."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그건 당신이 그녀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아파도, 그녀가 아픈 게 걱정될 만큼 그녀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는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나와달리, 나보다도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거겠죠."
우리는 술을 더 마셨고, 그는 그녀에 대해서 더 많은 얘기를 했다. 행복했던 순간들도, 아팠던 기억들도. 어느새 위스키 한 병이 바닥에 보였다. "그래도, 이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게 있어요.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이제껏 나의 삶은, 하루하루를 어쩔 수 없이 버티며 지탱해왔던 거였어요. 혹독한 현실과 홀로 싸워가며 의지할 데 없이 너무 외로웠고 지쳤고 힘이 들었죠. 그래서 이제는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아보려고요. 이제는 나도 내 행복을 찾고 싶어요." 그는 술에 조금 취했지만 그래도 힘 있는 눈빛으로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