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것들의 긍정성(1)
우리에게 함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오늘 그린피스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린피스 서명 운동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전화였다.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린피스의 환경 운동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간간히 네, 알고 있어요 따위의 반응을 했을 뿐이다.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대개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고,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보였으니까.
공동의 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건 어렵다. 그거야 말로 전체주의적인 생각이다. 사회와 공동체를 개인보다 우위에 둘 수는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회가 올바르지 않아도, 공동체가 완전하지 않아도 개인들은 살아갈 수 있다. 사회는 필요없다. 질서만이 필요할 뿐이다. 사회적인 질서가 아니라 그저 질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질서가 있으면 사회는 만들어진다. 결단코 사회가 먼저 형성되고 질서가 완성된 적은 없다. 질서 속에서 사회가 만들어지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질서와 사회가 다듬어졌을 뿐이다. 이 세상의 창조도 질서가 먼저였다. 빛과 어둠이라는 질서.
개인과 집단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를 해결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공동의 선을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실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개인이 존재하고, 질서가 생성되고,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생존하고 실존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실존을 위해 현실을 소모해야 한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말할 수 있다. 나의 현재를 써서 타인의 미래를 살려야 한다는 건 부당한 거래다. 파국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동의 선은 일종의 보험이다. 우리는 장기적인 보험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내 주머니와 무자비한 식욕, 어떻게든 더 편하게 살기 위한 모든 방식들을 줄이고 장기보험에 저축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이동이 줄어드니 자연환경이 좋아졌다. 식욕을 억제하고, 부동산에 사용하는 비용을 낮추어서 그 돈을 환경문제에 투자해야 한다. 우주로 쏘아 올리는 막대한 예산을 환경에, 절반만 투자하자. 북극곰이 죽어가는 건 인간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 방송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다. 부끄러움은 여기서 찾아온다. 우리는 알고 있지만 외면한다. 그리고는 마치 몰랐던 것처럼, 혹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나서야지 자신이 나서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나 역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