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Jun 18. 2022

수국을 보러 갈 필요가 없었다       

널린 게 수국인 걸


바야흐로 제주는 수국 철이다. 여기저기 수국이 유명하다고 난리 난리. 사실 요즘 지나다니다 보는 게 맨 수국인데. 거슨세미 오름에도 산수국이 많았고 차도에 심어놓은 수국도 한창 흐드러졌다. 우리 집 맞은편 집에도 벽 한편에 조르르 탐스럽게 수국이 피었다.



이곳 동쪽에는 꼭 가봐야 한다는 수국 명소가 여럿 있다. 혼인지, 종달리 수국 길 등. 아침엔 하늘이 잔뜩 흐렸다. 담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비 예보. 그때부터 제주는 장마 시작인 것이다. 돌연 맘이 바빠졌다. 비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수국을 구경하러 가야 하려나?? 10시에 집을 나섰다. 먼저 혼인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종달리를 거치면 되겠다.


나는 오랜만에 여행자처럼 치장(?) 했다. 스페인 여행에서 사 온 빨간 무늬 바지와 연보라 칠부 티셔츠에 회색 샌들. 그리고 챙이 넓은 나들이 모자. 평소의 (도민용) 복장은 기능성 티셔츠에 바지, 그리고 트래킹화. 햇빛을 막는 날개가 달린 꽃무늬 모자. 몇 달 내내 그렇게 하고 다녔다. 나에게 외출이란 주로 곶자왈이나 오름, 숲길을 걷는 일이므로. 제주에선 사람들 옷차림만 봐도 도민인지 관광객인지 바로 파악이 된다.



혼인지는 역시 소문대로 수국이 가득했다. 벌써 져가는 꽃도 많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나는 왜 아무 감흥이 없을까? 걷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잔디밭은 푸르렀다. 특히 기와집을 멋들어지게 둘러싼 수국은 당연히 예뻤다. 그냥 예쁘기만 했다. 또한 서귀포시에 속해서인지 혼인지는 무척 습했다. 구좌읍과 성산읍의 습도는 사뭇 농도가 달랐다.



깔끔하게 만들어놓은 관광지는 갈 때마다 묘하게 기분을 가라앉힌달까. 예쁜데, 예쁜데 감정이 안 생긴다. 밋밋하다. 봄에 벚꽃과 유채꽃이 쌍으로 만발한 녹산로에 갔을 때도 그랬다. 이쁘다, 멋지다. 그러나 감동이 없다. 억지로 감탄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오히려 우리 동네 근처 덕천리 마을 한적한 도로에 가득 핀 벚꽃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곳을 몇 번이나 걸었다.         


아니야, 종달리 수국 길은 다를지도 몰라. 종달리 해안 도로로 차를 몰았다. 해맞이 해안로를 달리다 소위 '그 수국 길'이 나타났다. 에게, 겨우 이거야??? 대단치도 않은 걸? 도로를 따라 수국이 듬성 등성이거나 간혹 푸짐하게 피어 있었다. 철이 조금 지난 것도 같았다. 이 정도의 수국 길은 이름 없는 도로에도 널렸다고. 날이 흐려 바다가 온통 회색이었다.    


나는 좀 특이한 취향을 가졌나 보다.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관광지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눈으로만 보는 볼거리에 도통 무감한 사람. 의무감에 한 번쯤은 들러야 할 것 같은 명소는 앞으로 가지 않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유명 관광지가 은근히 마음에 걸렸더랬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지. 생긴 대로 살자.


나를 설레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오름을 오르다 우연히 마주치는 야생화라든가, 숲길을 걷다 미처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불뚝불뚝 솟아난 나무뿌리라든가, 곶자왈 깊은 곳에서 머리 위로 부는 바람이라든가, 구부러진 중산간 도로에서 시야를 압도하는 짙은 안개라든가, 집 앞 도로에서 동글동글 익어가는 노란 꾸지뽕나무 열매라든가. 내 감정의 발연점은 이쪽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부터 외식해 봤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