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사람이 있는 여행, 소도시 여행, 느린 여행을 사랑하는 여행작가 소율입니다.
그동안 제가 쓴 책들과 강의를 통해 저에 대한 소개를 했었고 브런치에도 조각글로 쓴 적이 있어요.
이번에 정리하는 마음으로 자기소개서를 써볼까 합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생 여정을 공개해야 할 것 같아요.
제 손잡고 함께 가보실래요?
INTJ입니다
다섯 남매의 넷째 그리고 작은 딸.
충북의 소도시 충주가 고향이다. 형제가 많아 북적북적 살 부대끼며 자랐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위로는 오빠, 아래로는 남동생이라 애초에 노는 게 달랐다. 언니는 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장남인 큰 오빠는 일찌감치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갔다. 부모님의 관심은 언제나 장남과 장녀에게로만 쏠려 있었다. 나의 위치란 가운데만 불룩하고 밖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실속 없는 샌드위치 같았다.
나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아이처럼 어른 말씀을 잘 들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장사에 바쁜 엄마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릴 때부터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했다. 그건 맏아들도 맏딸도 막내도 아닌 중간에 끼인 아이로서 그나마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름의 처세였다. 늘 집에서 놀았다. 동화책 읽고 그림 그리고 글씨 쓰고......
머리가 굵어 중학생이 되자 ‘낭만’이란 단어가 근사해 보였다. 낭만적인 사람, 낭만적인 계절, 낭만적인 영화, 그리고 낭만적인 기차여행! 그때 처음 '여행'이란 게 있는 줄 알았다. 기차 타고 떠나는 낭만여행. 그게 단발머리 여중생의 로망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기차를 타고 멋진 신세계로 여행을 떠나야지. 내 꿈의 여행지는 현실의 어떤 곳이 아니라 그냥 미지의 세계였다. 내 낭만의 정수는 언제나 ‘기차여행’이었다. 허나 기차여행은커녕. 여고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충주 밖으로 일탈 한번 시도해 보지 못하는 쑥맥이었다. 그리고 순진한 꼬맹이는 자라서 엄마가 되었다.
주부에서 초보 여행자로
다시 여행을 떠올린 건 나이 마흔.
지나고 보니 40년을 여전히 모범생으로 살았다. 나보다 타인에게 얽매였고 타인의 요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인생에서 다른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며느리 자리를 슬며시 내려놓고 나 자신으로 살아 보고 싶어졌다.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라 날라리로 살고 싶었다! 이거야말로 사춘기에 버금가는 사추기.
꺼져버린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라도 못 할 건 뭐야? 아이는 어느새 열두 살이었고 드디어 첫 해외여행을 시도. 세 식구가 함께하는 5일간의 태국 여행이었다. 비행기 표부터 숙소, 갈 곳까지 혼자서 준비를 했다. ‘해보니 얼마든지 다닐 만하잖아!’ 자신감 백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미 다음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다.
6개월 뒤 이번에는 아들과 둘이서 21일간의 동남아 여행을 감행했다. 빵빵한 배낭을 메고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를 돌아다녔다.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아이는 아무 데서나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었다. 그만하면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이젠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매년 한 달씩 여행을 다녀오자. 그렇게 각 대륙을 가보는 거야, 아자!’
베테랑 여행가로
그런데,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1년, 2년씩 장기 여행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세계 일주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실현하고 있는 꿈이었다.
‘1년에 한 번씩 갈 수 있다면, 그냥 1년을 다녀보는 건 왜 안 되지?’
앉아서 꿈만 꾸는 세계여행. 그걸 직접 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2011년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폴란드를 돌아다녔다. 총 10개 국, 기간에 비해 나라 수가 적다. 대개 한 나라에서 한 달 가량 머물렀다. 애초부터 나는 느림보 여행이 체질인가 보다. 우리 모자가 초보 여행자에서 베테랑 여행가로 업그레드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엔 반전이 있다, 사실 여행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왔다.
한창 즐거웠던 폴란드에서 갑자기 형부의 부고가 날아왔다. 이 여행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고 싶었는데 혼란스러웠다. 돌아가서 폭풍처럼 몰아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없었다. 비록 중단된 여행일지라도 차분히 갈무리할 경황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힘든 언니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유방암 환자로
“암세포가 나왔습니다.”
형부의 장례를 치르고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 할 무렵. 나는 느닷없이 암 환자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진실로 자신을 돌보아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 머리가 멍할 뿐이었다. 그럼 얼른 수술을 받아야 하겠구나. 이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아래로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안갯속에서 날뛰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던 게다. 누가 조종하는지 보이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손잡이를 꽉 쥐고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곧 대학병원으로 옮겨 수술 날짜를 잡았다. 2011년 10월 17일,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러고는 수술과 더불어 호르몬 치료,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받았다. 인생의 파란만장함에 비하면 여행의 파란만장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것 역시 여행임을 깨달았다. 중단된 여행은 유방암이라는 새로운 여행으로 이어졌다.
뒤의 여행은 앞 여행보다 훨씬 스펙터클했다. 롤러코스터가 아래로 곤두박질칠 때와 위로 치솟을 때의 모든 감정과 맞부딪쳤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적응해야만 했고 결국 적응해냈다. 항암치료가 끝나갈 때쯤엔 제법 노련하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작가로
실은 억울했다.
그래서 항암으로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쇼트커트로 자랄 즈음부터 원고를 썼다. 안타깝게 중단된 여행이었지만 때문에 더욱 책으로 남겨야 했다. 그것이 진정한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유방암 치료로 인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누구보다 절실하고 절박했다.
여행 중에 늘 글을 쓰면서 다녔기 때문에 초고의 초고가 이미 있었다. 2014년 드디어 <고등학교 대신 지구별 여행>을 출간할 수 있었다. 첫아이처럼 작가에게 첫 책은 소중하고 애틋하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이후로 해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날아다녔다. 그 덕에 가장 힘들던 생의 한가운데를 담쟁이가 벽을 넘듯 천천히 그러나 무사히 통과했다. 늦어도 괜찮다. 느려도 괜찮다.
2018년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2022년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그래서, 베트남>이 나왔다. 어느새 자식 넷을 거느린 엄마가 되었다.
혼자서, 느리게, 소도시에서 머무는, 사람을 만나는
주로 혼자 다닌다.
혼자여야 오롯이 여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실수도 행운도 혼자일 때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더욱 단단해진다.
사람을 만나야 즐겁다.
거대한 유적지, 천국 같은 풍경이라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에겐 2% 부족했다. 평범한 동네라도 그리운 누군가가 있다면 꽉 찬 여행이라 느껴진다. 나를 반겨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보다 따뜻한 여행지다.
느리게 머문다.
눈치 볼 일도 없고 서둘 일도 없다.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여행한다. 난 알다시피 엄청난 달팽이 과. 저질체력에다 환자 체력이다 보니 독촉, 강압, 억제... 이런 건 영 맞질 않았다. 언제다 '마이 웨이' 홧팅! 거기에다 오래 머무는 걸 좋아한다. 한 도시에서 최소한 삼사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있었다. 구석구석 쓸데없는 곳, 별 볼 일 없는 곳까지 걸어 다닌다. 나만의 비효율적인 여행법이다. 하지만 그게 나인 걸.
소도시가 좋다.
대도시는 지나치게 시끄럽고 분주하다. 사람들 역시 여유가 없다. 저는 작은 골목길을 끝까지 걷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하길 즐긴다. 구석탱이 조그만 카페에서 늘어지는 것도 가능하다. 여행지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작은 도시일수록 아주 쉽게 찾아온다.
연구소에서 하는 일
뒤늦게 여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여행에 서툰 초보 여행자들, 특히 4060 세대의 글쓰기와 독서, 걷기, 여행을 응원하고 탐구하는 곳. 상품으로 소비되는 여행이 아니라, 자신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과 만나는 관계로서의 여행과 글쓰기, 독서를 지향한다. 관광객이 아닌 독립적인 여행자, 책 읽고 글 쓰는 삶의 여행자를 위해 여행준비법, 쓸모 있는 여행기술, 여행 좀 다녀본 여행자들이 고민하는 인생에 대한 사유를 포함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해마다 프로그램은 바뀌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한다. 23년 상반기엔 <달팽이윤독> <단단클럽> <인챙첫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여행은 취미이자 일이 되었다. 무엇이든 내 입에 밥 넣어주는 일은 고귀하다고 믿는다. 기왕이면 좋아하는 일로 밥 벌어먹기가 목표. 전업주부였을 때 항상 목말랐던 게 경제적 독립이었다. 물론 남편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지만 그와 별도로 저 역시 일 인분의 경제적 인간이 되고 싶다. 그것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중.
지나고 보니
주부에서 여행자, 여행자에서 여행 작가, 여행 작가에서 강사로 자꾸만 변신한다. 작정한 건 아닌데 점점이 이어졌다. 또 무엇으로 변신할지 몰라도 변신은, 어쨌든 즐겁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엇’을 하나씩 꺼내어 빛이 나도록 닦는 기분이랄까.
"너희들, 뭐가 됐든 자꾸만 튀어나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