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아파트와 건축의 투시도와 조감도를 밤낮없이 손으로 직접 그렸던 그 시간이 직업이고 인생이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대표작이고, 대한민국을 빛낸 100인의 여성으로 선정되었다. 여행을 가면 멋진 남자보다 멋진 건축물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행 중에 만나는 멋진 건축의 선을 허물어뜨리며 마음 가는 대로 그린다. 건축은 사랑이고 드로잉은 자유다. 드로잉을 하며 세계를 여행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던 인도 여행 직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왔고 여행은 멈추었지만 인도를 계속 그렸다.'
작가는 여행을 하면서 건축의 고정된 선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그림을 그린다.
신문 위에, 콜라주로, 파스텔로 다양한 시도로 선을 허무는 작업을 한다.그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드로잉 트래블러 인디아 로맨스/메종인디아/2022>를 출간했다.
글을 쓴 자림 작가는 책을 만든 메종인디아 출판사 대표이자 인도 여행 서점의 운영자다.
자림 작가 소개(예스 24 출처)
'막다른 길 끝에서 작고 무한한 책방을 하면서 인도와 한국을 오가는 여행을 만든다. 자유로운 삶의 여행을 아름답게 지속하고 싶던 즈음에 부탄에서 길잡이 친구가 지어준 자림(부탄 말로 ‘아름답다’라는 뜻)이란 이름의 무게를 사랑한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그림 앞에 주인공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조금 늦었다, 북토크가 막 시작한 참이었다.
참석자들은 원형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베레카 작가는 표정만으로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인상이었다.
오랫동안 사업을 일구고 드로잉 작가로 활동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자림 대표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사뭇 달라 보이는 둘이 묘하게 어울렸다.
오간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부분을 옮겨 보겠다.
"평생 건축미술 드로잉을 해왔다. 자림 대표님은 운명처럼 만난 길 위의 스승이다. 너무 감격스럽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코로나 시절 인도 그림만 그렸다. 인도에 대한 그리움이 강했다. 모든 여행이 인도로 시작해서 유럽 등으로 이어진다. 갈 때마다 더 풍부한 인도를 느낀다. 인도 여행은 아시다시피 호불호가 강하다. 하지만 인도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인드로 접근하면 좋겠다."
"나는 작품에 유리 끼우는 걸 싫어한다. 만져도 된다. 좀 만지면 어떤가? 개포 주공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과정을 보았다. 담장을 허물 때부터 운전하면서 아파트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림막을 치기 전 마지막 건물까지 찍었다. 그 후 2년간 그림을 그렸다. 사라져가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만져도 된다니.
자기 그림을 만져도 된다는 화가는 처음 보았다.
실제로 파스텔로 작업했다는 작품에 자신의 손가락을 쓱 문질렀다.
대범함, 파격, 허물기, 규칙에서 벗어나기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진지하면서 화기애애한 북토크가 끝났다.
드로잉 클래스를 신청한 사람들은 갤러리 안쪽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펜과 두툼한 노트를 하나씩 받았다.과연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다들 호기심에 찬 눈빛이었다.
의외로 작가님의 주문은 간단했다.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고르고 그걸 그리란다.
그냥 맘대로 막바로.
엇, 그래도 되는 건가요?
역시 예상을 벗어나는 스타일이시다.
그럼 아무렇게나 손 가는 대로 그려 볼게요.
우린 마치 유치원생이라도 된 듯 마음 놓고 선을 그렸다.
나는 며칠 전에 찍은 서울대공원 잔디밭 사진을 꺼냈다.
나뭇잎이 하늘에 가득 찬 푸르른 전경.
비록 그리기엔 복잡해 보였고 자신은 없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풍경이니까.
도구는 연필이 아니라 펜.
어차피 수정할 수가 없다.
아마 연필이었다면 지워서 다시 그리느라 정신없었을 터이다.
연습할 필요도 고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 쏙 들었다.
'잘못'이란 존재할 수 없고 어떻게 그려도 모두 '정답'인 셈이다.인생도 실전인데 드로잉도 실전이구나, 그저 직진이닷!!!
작가님은 우리의 작품을 조금씩 손봐 주셨다.
음영을 넣고 가느다란 선으로 면을 표현했다.
전문가의 손길이 더해져 한결 그럴듯해진 그림들.
90분 동안 2장을 그린 사람도 있었다.
백만 년 만에 그림을 그리노라니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다.
그리는 시간이 힐링 자체였다.
내 안의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그림이 완성되면서 서서히 평온함과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아,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맛'이다.
여행 작가로서 나에게 여행 드로잉이라는 세계는 '멀지만 가까이하고 싶은 당신'같은 존재랄까.
그림에 대단한 관심이나 소질은 없다만, 어쩐지 가느다란 끈이라도 잡고 싶은 소망을 늘 품었다.
취미로 데생과 생태 세밀화(요즘 말로는 보태니컬 아트)를 배운 지는 무려 17년 전이고, 캐리커처와 캘리그래피, 민화는 5년 전에 조금 배우다 말았다.
아 지나치게 오래전 일이라 언급하기도 민망하기 짝이 없네.
뭐든 오 년은 지속해야 평생 취미로 발전하던가 중급 아마추어라도 될 텐데.
나의 끈기는 짧고도 얇아서 각각의 배움이 몇 개월에서 일이 년을 넘지 못했다.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만 하고 끈질기게 이어온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