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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여자 Sep 13. 2024

마인크래프

전역하면서 육군사관학교 관사를 나와야만 했다. 둘이서 그동안 모든 돈으로 아파트 전세 계약을 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부부의 힘만으로 구한 집이었기에 마치 우리 집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남편과 나는 그 집이 좋았기 때문에 전세금을 올려주더라도 계속 그 집에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집주인은 전세를 월세로 전환한다며 월세 70만 원을 요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70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우리 부부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월세로 들어가고 조금이라도 남는 돈으로 중심지에 아파트를 사놨더라면 어땠겠냐는 후회도 남는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경제적 지식이 없었다.     


우리가 다시 집을 구하던 2010년은 전세 대란이 있던 해였다. 집값은 내려갔지만 전세 공급은 잘되지 않아 전세가 귀했다. 물건이 있다고 공인중개사로부터 연락받아 가보면 조금 전 계약체결 되었다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물건을 잡으려고 하면 다른 세입자가 더 많은 보증금을 주겠다고 해서 물건을 빼앗긴 적도 많았다.    

 

1996년도에 지어진 시영아파트에서 수리가 잘된 전셋집을 찾는 것은 산에서 산삼을 찾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운 좋게 산삼을 찾았다. 그러나 다시 2년은 너무 빨리 돌아왔다. 그 2년 동안 나는 아이를 갖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다. 당연히 맞벌이할 때보다 돈은 쉽게 모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날도 남편이 회사에 있는 동안 나는 임신한 상태로 전셋집을 구하러 다녔다.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아갈 예쁜 집을 찾았지만 계속되는 전세대란에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지금 사는 집보다도 못한 곳으로 갈 상황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지쳐 돌아온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을 이어갔다,     


( 나 ) “그냥 이참에 집을 사자”     


(남편) “우리가 돈이 어디 있어?”     


( 나 ) “돈 다 모으고 집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돈 다 모으고 사면 집 못 사”     


(남편) “집값도 계속 내려가고 있잖아, 돈 좀 더 모으고 사자”     


( 나 ) “돈 모아서 언제 사? 그러다가 아기 태어나도 2년마다 계속 이사 다닐 거야?”     


  남편과의 대화는 계속 겉돌기만 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남편의 생각이야 어떻든 집을 사기로 하고 내 집 마련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국토부 실거래가와 KB시세를 검색하며, 지난 10년간 집값 추이를 비교했다.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을 들러 저렴하게 나온 집이 있는지 매일 돌아다녔다. 우리가 살던 동네 10년간 집값 추이를 보니 2008년 3억 초중반으로 상승을 찍고 집값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당시 로열동 층이 2억 후반이었으니 최고점에서는 한참 내려온 상태였지만 또 어디까지 하락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금은 부동산 가격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며 우상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계속 집값이 내려갈 것만 같아 집을 사는 것도 불안했다. 우리가 가진 1억 6천만 원 전세 보증금도 대출금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돈조차도 집을 사는 데 필요한 2억 중후반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되팔 때를 고려해서 1층을 제외한, 가장 저렴하고 수리가 잘된 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리가 아주 잘된 3층 집을 보게 되었다. 집을 보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꼈던 포근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취등록세 1.1%라는 한시적 인하가 연말까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이후 영구적으로 인하가 되긴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1억 이상이 더 필요했다. 남편 회사에서 회사 대출을 더 받고, 마이너스 통장 한도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외벌이에 1억 이상의 빚은 보수적인 우리 부부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일단 남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고 천안에 사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와서 집을 봐줬으면 했다. 엄마까지 동원해서 남편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었을 무렵 남편에게 전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고 말했다. 집에 온 남편을 데리고 친정엄마와 함께 그 집을 보러 갔다. 남편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남편의 표정에서 대출에 대한 부담, 자금 부족에 대한 부담을 읽을 수 있었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남편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길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고민하는 남편이 보였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라 보며 남편을 계속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편이 비장한 표정으로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남편) “그 집 우리가 사자”     


( 나 ) “정말? 웬일이래? 며칠 전엔 그렇게 고민하더니”     


남편은 늘 2억만 모으면 집을 사자는 말을 하곤 했다. 남편도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서울로 온 지방 사람이었다. 친척 집에, 하숙집에, 자췻집에 남편도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내 집 마련에 대한 꿈이 컸다. 그러나 누구에게 손을 벌릴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내 집 마련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계약금을 내고 계약서를 썼다. 친정엄마가 옆 방에서 주무시고 있는 동안 우리 부부는 자금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회사 대출을 더 받고 마이너스 통장 한도도 증액하면 모자란 돈은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알뜰히 살림하면 그때까지 일부는 갚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이 그룹 지주사 감사실로 옮겨가면서 퇴직금 중간 정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다행히 퇴직금이 적지 않아 대출금의 상당 부분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간 월급이 줄어들어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추억속의 세번째 신혼집

그 아파트는 서울 외곽 25평 작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이사한 첫날 지게차로 짐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남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사 다닐 때마다 너무 힘들고 서럽고 외로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곧 태어날 호박 이(태명)와 함께 이 집에서 행복하게 안정되게 살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마련한 첫 우리 집에서 호박이가 태어나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랐다. 남편은 다시 회사를 옮기고 저녁에는 대학원을 다니며 학위를 땄다. 나는 열심히 부동산 공부를 해서 재산을 늘렸다. 그렇게 그 집은 Home Sweet Home이었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떠나던 날이었다. 옆집에 살던 국가유공자 할아버지도, 호박이가 즐겨 가던 떡볶이 할머니도, 위층에 살던 아기 엄마도, 친하게 지내던 경비 아저씨도 모두 우리 가족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지금 사는 집이 더 좋은 집이지만 우리 가족 마음 한구석에는 그때 그 집이 따뜻하고 정감 있고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한, 언젠가 다시 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으로 남아있다.      


우리 부부는 그 집을 가꾸며 행복했다. 김치 냄새가 올라오는 통에 직접 베란다에 트랩도 설치하고, 베란다 페인트칠도 해보고, 깨진 타일도 직접 보수했다. 세탁실 선반도 직접 설치하고 애정을 가지고 집을 가꾸고 우리의 보금자리로 만들어갔다. 우리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던 그런 집이었다. 우리가 만든 첫 집 그래서 우리는 이 집을 ‘마인크래프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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